▲ 장성운 울산 울주문화원 이사

최근 울산의 문중 연구를 하다 보니 이미 40여년 전 저출산을 예견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고 실행해 온 문중이 있어 소개한다.

파평윤씨 소정문회(蘇亭門會)가 경기도에서 울산에 온 것은 조선 연산군 때다. 이때 경기도 안성에 살았던 여러 형제 중 두 형제가 지금의 울주군 온산읍 상회마을 서포(西浦)항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이곳에서 얼마 동안 살다가 400여년 전 울산으로 와 1명은 공업탑 로터리 부근 신정동에 자리 잡았고 다른 1명은 북구 송정동 사청마을로 가 이곳에 터전을 잡았다. 오늘날 이들 두 마을에 파평윤씨가 많이 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중은 이미 40여년 전 앞으로 우리나라가 저출산 문제로 걱정할 것을 예견하고 출산 장려 정책을 따로 마련해 이를 실행해 옮겨 지금은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출산 장려 정책의 모범 문중으로 소문이 나 있다.

파평윤씨 소정문중이 출산 정책을 시작한 때는 제7대 윤진백(尹晉伯) 회장 때부터다.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가 70년대 중반으로 박정희 정부는 우리나라가 국토는 좁은데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면 먹고살기가 힘들다면서 ‘아들딸 구분 말고 한 명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와 함께 산아제한을 권장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이때 윤씨 문중은 젊은이들이 아기를 낳지 않으면 윤씨 문중의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아이를 낳는 가정에 출산 장려금을 줬다. 윤씨 문중에서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은 조선시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축첩제도가 있어 인구가 늘어났으나 갑오경장을 맞아 축첩제도를 금하면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윤씨 문중은 스스로 양반 문중임을 자랑했지만, 문중 사람들이 줄어들어 걱정했다. 따라서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시집온 새댁이 출산하면 200만원의 출산 장려금을 주기로 하고 이를 실행했다. 윤씨 문중이 출산 장려금을 줄 당시 우리나라 기업체의 직원 월급이 30만~40만원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하면 당시로는 엄청난 출산 장려금을 준 것이다.

윤씨 문중은 이외에도 문중 어린이가 초등학교 졸업 때 효도 교육비로 30만원, 성년이 되는 19세때는 따로 200만원을 지원해 이 돈을 대학 등록금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등록금 지원은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고교 졸업 후 취직하는 학생도 고려해 나중에는 대학에 가지 않더라도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 일률적으로 대학 등록금에 준한 액수의 돈을 줬다.

이외에도 문중 출신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면 500만원의 축하금을 따로 줬다. 그러나 박사학위 축하금은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이 대부분 부잣집 자녀라는 것을 알고 나중에 절반으로 줄여 줬다.

가정을 중시했던 윤씨 문중은 출산 장려금 외에도 문중 젊은이가 결혼하면 장려금 등으로 성인 700만원, 미성년자 350만원을 지급한 것이 40년이 훌쩍 넘었다.

윤씨 문중에서 시작한 이런 복지정책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중 특히 출산 장려금은 윤원석(尹元錫)씨가 18대 문회 회장이 되면서 300만원으로 올려 지급하고 있는데 올해만 해도 벌써 4명의 집에서 이 축하금을 받아 갔다. 윤 회장은 8대 윤진백 회장의 장남이다.

윤씨 문중이 이처럼 돈이 많이 드는 출산 장려금 정책을 지금까지 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조상들이 남겨 놓은 문중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출산 장려 정책이 지속되면서 다른 문중에서는 후손이 줄어든다면서 걱정하지만, 윤씨 문중은 이런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울산에는 윤씨 문중 외에도 부자 문중이 많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존망이 달린 출산장려 정책은 국가 차원에서만 추진할 것이 아니라 윤씨 문중처럼 울산의 다른 부자 문중에서도 솔선수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성운 울산 울주문화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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