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숙 수필가

토함산 동쪽 폐사지에 가을 햇살이 충만하다. 대종천 상류, 가파른 계곡을 끼고 있는 절터는 이름도 내력도 없다. 8세기 신라 석탑의 걸작인 서 오층석탑, 일층 몸돌 위에 지붕돌만 올려놓은 동탑이 사라진 절집 역사를 전설처럼 풀어낸다. 깨어진 석조 불대좌가 적멸의 공간을 만드는 곳이다.

수수께끼로 남은 장항리 절터에 1923년 4월 어느 야밤에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에 모두 잠을 깼다. 부처님 사리를 훔치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석탑과 석불을 파괴한 것이다. 석탑은 내려앉고 석불입상도 처참하게 깨지고 무너졌다. 1932년 탑재를 수습하여 서오층석탑은 복원이 되었다. 지붕돌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다.

이곳은 철책이나 경보음도 없는 기꺼운 곳이다. 덕분에 오층석탑을 오롯이 내 것인 양 쓸어보고 안아보며 눈맞춤도 한다. 햇빛을 흠뻑 받은 석탑이 연한 살구색을 드러내면 마치 살아 숨을 쉬는 듯하다. 1층 몸돌에는 문비와 함께 4면 모두에 2명씩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다. 양감이 뚜렷하고 조각수법이 정교하다.

연화대좌를 밟고 선 금강역사는 두툼한 입술, 튀어나올 듯한 눈동자에 두광까지 갖추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팔은 꿈틀대고, 호방한 권법자세는 부처님을 수호하는데 한 치의 모자람도 없다. 벌레들도 금강역사상 입속을 들락거리고 뿔뚝 나온 배 위에서 볕 쪼임도 한다. 미물들도 경계 없는 세계에서 유유하다.

국보인 서 오층석탑보다 동탑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다. 기단석도 없이 지붕돌만 대충 놓인 모습이 애잔하다. 마모가 심한 탓에 모서리가 둥글둥글하다.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 발돋움 하면 이끼 낀 지붕돌이 상처로 얼룩진 지난날을 들려준다. 사람살이의 덧없음도 이 동탑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금당터에 홀로 남은 팔각의 연화대좌를 마주한다. 대종천 물소리에 귀를 씻고 바람과 햇볕이 전해주는 설법을 듣는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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