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줍는 65세이상 노인 4만2000여명
평균연령 76세 월평균 15만9천원 벌어
정치권, 노인 빈곤문제 대책 서둘러야

▲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40년 이상 시인으로 살아왔지만 저는 여전히 좋은 종이에 민감한 편입니다. 당장 사용하지 않을 고급종이를 사서 놓거나, 좋은 노트를 보면 일단은 사놓습니다. 200자 원고지에 볼펜을 꼭 잡고 ‘펜 혹’이 생기도록 글을 썼던 20대에도 그랬고 노트북에 시를 찍어서 A4용지에 출력해서 사용하는 지금까지도 이 욕심은 사라지지 않는 ‘갈증’ 같은 것입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의 시를 위해 준비한다고 하지만 그런 종이나 노트에는 시를 쓰지 않았고, 무엇인가 기록하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그러다 변색이 되면 절망하고 탄식하는 경우가 되풀이됩니다. 누군가 ‘아직 쓰이지 않는 시가 가장 위대한 시’라고 비유했지만, 그냥 제 욕심일 뿐이었습니다. 큰 욕심은 아니지만 호사스러운 욕심인 것은 맞습니다.

젊어서 ‘미농지’(美濃紙)를 좋아했던 적이 있습니다. 미농지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질기고 얇은 종이의 하나’입니다. 묵지(墨紙)를 받치고 글씨를 쓰거나 장지문 따위에 바르는 데에 쓰는 종이인데, 일본에서 그 종이가 나는 지역 이름이 미노(美濃)라서 미농지라 부르는 종이였습니다. 좋은 시를 만나면 뒤가 비치는 미농지를 받쳐서 잘 깎은 연필로 따라 적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우리 한지에 쪽빛을 들인 감지(紺紙)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비단 오백 년 종이 천년’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단에 쓴 글은 오백 년이 가지만 감지에 쓴 글은 천년을 간다는 비유였습니다. 그때 저는 ‘경주남산’을 통해 신라 천년의 시간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감지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감지 금니사경’이나 ‘감지는 네 사경’ 같은 나라의 국보와 보물에서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시인으로 가당찮은 욕심은 그 감지에 시를 적어 그 앞에 미농지를 받치고 제 시집 한 권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불가능한 꿈입니다. 시인이 일생에 단 한 권의 시집을 낸다는 것은 이런 시집이 아닐까 하고 꾸는 꿈일 뿐입니다. 그런 종이에 그런 인쇄에 쏟아지는 그렇고 그런 책들을 보면 책의 수명은 고서적보다 하루살이 같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폐지 줍는 한 할머니를 보면서 종이에 대한 제 생각에 변화가 왔습니다. 제가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는 코스에 저보다 일찍 손수레를 끌고 가며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나갈 때마다 만나게 되니 자연히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폐지만 줍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물상에 팔 수 있는 것은 다 줍고 분류해서 바리바리 싣고 갔습니다.

그때쯤 보건복지부가 공개한 ‘2023년 폐지수집 노인 실태조사’ 결과를 읽었습니다.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읽고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노인이 100㎏의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가져가면 받는 돈이 6000원이었습니다. 조사 방식은 1대1 대면 조사로 전국 폐지수집 노인 1035명을 만나 실태를 파악했다고 했습니다. 이분들은 하루평균 5, 4시간씩, 주 6일 폐지를 수집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우리나라에 생계유지 등의 이유로 폐지를 줍는 65세 이상 노인이 4만200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들의 평균연령은 76세며, 한 달에 평균 15만9000원을 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시간당 소득은 1226원이었습니다. 그 결과를 접하며 우리나라 노인 문제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입이 썼습니다.

폐지수집 목적은 ‘생계비 마련’(54.8%) ‘용돈이 필요해서’(29.3%) ‘건강 관리’(9.1%)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폐지수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타 직종 구직 곤란’(38.9%) ‘현금 선호’(29.7%) ‘자유로운 활동’(16.1%) 순이었습니다. 하지만 폐지수집 노인 중 ‘우울 증상’ 보유 비율은 39.4%로, 전체 노인들의 우울 증상 13.5%보다 2.9배 많아 그 일이 힘들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습니다.

가난은 당신 탓도 제 탓도 아닙니다. 다만 노인 문제는 정치 문제고, 정치 탓입니다. 정치가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저의 종이에 대한 호사는 이젠 중단할 것입니다. 그렇다는 말입니다.

정일근 경남대 석좌교수 UMFF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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