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해 말한다면 손톱만큼 치열한 경우도 없다 나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가르쳐준 그것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뱃머리 같은 것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배의 행방을 알 수 없듯 나는 잘려나간 손톱이 간 곳을 모른다

한때는 호미날이 되어 풀을 매고 아이의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뽑아주기도 하였다 항상 몸통보다 먼저 가서 더러움과 치욕을 견디고 꽃의 속 그 깊은 곳의 부드러움과 뜨거움을 내게 알려 주었던 전위의 촉수

붉은 피가 흐르는 펜촉을 나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바위를 찧는 독수리의 부리처럼 깨어지고 잘리어도 다시 돋는 신생의 힘

뿌리를 벗어나려 한번도 쉬지 않았던 그가 달을 품고 있었으니 그에게도 다만 저를 견디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어

손톱은 날고 싶었다 손톱이었던 기억을 잊고 훨훨 꽃잎처럼 날아서 어딘가로 가려 한 것이다 깎여 떨어지는 짧은 죽음의 순간에야 날개를 얻는 새

우리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가르쳐준 존재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날마다 자라지만 잘라도 아프지 않은 손톱은 살아있는 것일까? 사실 손톱은 죽은 각질 세포의 켜로 이루어져 있다. 그 뿌리에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면서 죽은 세포를 밀어내기 때문에, 손톱은 삶처럼 보이는 죽음이다. 손톱은 날마다 죽음을 품고 자라면서 손톱 끝에서 잘려나감으로써 죽음을 완성한다. 그러니 손톱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죽음을 가르쳐준’ 존재이다.

또한 손가락 끝에서 사물과 맨 먼저 만나기 때문에 바다로 나아가는 ‘뱃머리’와 같다. ‘호미날’이나 ‘펜촉’도 손톱의 쓰임새에서 끌어 쓴 비유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와 동료 죄수들은 도이치 오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짧은 순간이지만 자유를 만끽하는데, 그 오케스트라 연주도 손톱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손톱은 자유를 위해서 맨 앞에 서지만 자신은 자유롭지 못하다. 손톱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잘려나가 손톱에서 벗어나는 순간, 죽음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역설이다. 마치 손톱이 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자유와 구속,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가 그 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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