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빛, 매화풍정(梅花風情)
묵묵히 소임 다하는 군자의 표상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의 사랑 받아
속세 벗어난 은일의 꿈 투영하거나
의인화 통한 교감의 대상으로 삼아

▲ 제목:설중매 재료: 화선지, 수묵담채 규격: 140×70㎝ 화제 해석: 梅日生寒不梅香(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는 팔지 않는다)

경상일보는 갑진년을 맞아 새로운 기획물 ‘월요일에 만나는 문인화 산책’을 매월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이재영 서예가의 작품에 미술평론가인 김찬호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가 옛 시와 시조를 통해 작품에 의미를 더할 예정입니다. 문인화에 보다 가깝게 다가가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물은 흐르고 그곳에서 생명의 싹은 어김없이 움튼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21세기 현대사회는 정신적 가치가 물질문명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급진적으로 발달한 과학 문명의 공해, 전쟁의 위협, 집단사회에 의한 인간 주체성 상실 등이 지금의 시대를 병들게 하고 있다. 달빛이 호수에 떨어지고 매화와 만나 여리게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우리는 ‘느림의 여백’을 생각해 본다.

지난 2일 월출산 기슭 백운동 별서에 들렀다. 그곳에는 봄을 시샘하는 눈이 내리고 있고, 한 겨울 매서운 바람과 세찬 눈발을 견디고 서 있는 매화의 그윽한 향(暗香)이 퍼져가고 있다. 그 향을 따라가니 댓잎이 미풍에 떨고 있었다. ‘자태는 심원(深遠)함에서 생기고, 심원함으로 운치를 띤다(態以遠生 意以遠韻)’고 했다. 이는 심원해야 아름다움이 생긴다는 말이다. 백운동 별서에 시간, 공간, 축적이 만들어낸 심원의 미학적 공간에 풍경과 정회(風情)가 스며들어 있다.

백운동 별서는 처사 이담로(1627~1701)가 조성한 정원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12년 가을 별서에서 하루를 보냈다. 돌아간 뒤에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잊을 수 없어 서시와 발문, 백운동 12경 중 8수(옥판봉, 산다경, 백매오, 유상곡수, 창하벽, 정유강. 모란체, 취미선방)의 시를 직접 짓고, 초의가 3수(홍옥폭, 풍단, 정선대), 윤동 1수(운당원)를 쓰게 해 총 14수의 시를 완성한 후 초의(1789~1866)에게 ‘백운동도’와 ‘다산초당도’를 그리게 해 <백운첩>을 만들었다. 당시 백운동 4대 동주 이덕휘(1759~1828)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매화를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그 어디에 있든 자신을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묵묵히 맡은 소임을 다하는 정신적 의지의 산물로 그려지고 있다. 정약용이 백운동 3경을 노래한 시 ‘백매오(百梅塢)’가 이를 말해준다.

屋層巖翠 (잡옥층암취) 집 둘레에 층층 바위 더욱 푸른데
栽花百本紅(재화백본홍) 백 그루 홍매 나무 가꾸네
往來山色裡(왕래산색리) 산빛어린 속에서 오가노라면
都在暗香中(도재암향중) 온통 그윽한 향기 속에 있는 것 같구나 정약용 ‘백매오(百梅塢)’

세월이 흘러 바위 언덕 위에 심어둔 백 그루의 매화는 어디 가고 몇 그루 매화만이 정원을 차지하고 있다. 송나라 임포(967~1028)는 부패한 정치에 염증을 느껴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자처하며 서호 옆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어느 봄날 저녁 임포가 서호에서 물에 거꾸로 비친 매화의 정취에 감동해 지은 시가 바로 ‘산원소매(山園小梅)’다. 이 시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에 의해 자신도 임포처럼 은자적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을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고 있다.

‘산원소매’에는 ‘성긴 그림자 얕은 물 속에 비스듬히 비치고, 그윽한 향기 몽롱한 달빛 아래 은은히 풍기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구절이 있다. 드문드문한 매화 가지가 맑은 못에 비스듬히 비추고 은은한 매향이 사방에 퍼진다. 매화의 가지를 정적에서 동적으로, 매화 향기를 무형한 것에서 유형한 것으로 바꾸어 놓은 명문장이다. 매화의 ‘성긴 그림자(疎影)’와 ‘그윽한 향기(暗香)’에는 매화의 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은은하게 퍼지면서 모두를 품어 안는 듯하다.

이황(1501~1570)은 유독 매화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매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매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인내하고 이른 봄을 알리는 전령사와 같다. 그래서 예부터 선비의 정신적 표상으로 ‘군자’를 상징한다.

獨倚山窓夜色寒 홀로 산 창에 기대서니 밤기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 위로 둥그렇게 달이 떠오르고
不須更喚微風至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이 일고
自有淸香滿院間 맑은 향기 저절로 서원에 가득 차네. 이황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

이 시에는 매화에 자신의 마음을 의탁해 고산에 은거했던 임포처럼 세속의 경계 너머에 거처하는 은사적 삶을 살아가는 ‘은일(隱逸)’적 풍모가 담겨있다. 이황에게 매화는 학문의 영역, 특히 성리학적 사유에 포섭되는 의인화된 교감의 대상으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이황이 지향했던 감성적 사유를 대변하는 것으로 그의 철학적 특징이 매화의 형상화에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황의 <매화시첩>에는 제화시가 있다. 그림에 그려진 매화를 감상하고 느낌을 담은 시이다. 이는 이황의 서화 비평에 대한 안목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속세를 벗어난 산수의 은일을 꿈꾸었다기보다 속세와 산수 사이 그 어디쯤에 은일을 꿈꾸었다고 해야 하겠다. 그가 직접 계획하고 의미를 부여했던 도산서당이 이러한 곳이며, 매화는 바로 이 공간의 표상으로 존재한다.

김계진이 소장한 채무일(1496~1546)의 월매도를 보고 이황이 지은 시다.

古梅香動玉盈盈 해묵은 매화에 향기 나니 옥처럼 아름답고,
隔樹氷輪輾上明 나무 너머 차디찬 둥근 달 환히 떠올라 맴도네.
更待微雲渾去盡 옅은 구름이 다 사라지길 기다리니,
孤山終夜不勝淸 고산엔 밤새 맑음을 못 견디리라. 이황 ‘제체거경묵매(題蔡居敬墨梅)’

매화의 색깔과 자태를 옥처럼 맑고 투명하며 빙설과 같이 희고 깨끗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신적 고결함에 은은한 향기마저 머금고 있으며 이는 마치 탈속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고산’은 임포의 이미지와 겹쳐 보이게 함으로써 탁한 현실의 이미지인 ‘옅은 구름’과 ‘검은 먼지’에 대비해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변치 않는 맑음과 그런 안색을 띤 매화의 자태가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이황의 시에서 매화, 달, 옅은 구름, 검은 먼지. 고산의 단어를 통해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과 거리를 두는 ‘대은자(大隱者)’의 면모를 읽어낼 수 있다.

매화의 끝에 얹혀있던 눈이 이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고, 그 찰나에서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된다.
글=김찬호 미술평론가·그림=이재영 서예가
□작가 약력

▲ 이재영 서예가
▲ 이재영 서예가

이재영 서예가
·개인전 5회(울산, 서울, 프랑스)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
·울산서예협회 자문위원
·현재 송경서화연구실 운영

 

 

 

 

▲ 김찬호  미술평론가
▲ 김찬호 미술평론가

김찬호 미술평론가
·저서 <서양미술 이삭줍기> <동양미술 이삭줍기> <회화적 언어를 찾아가다>
·네이버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독일문학’ 집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주임교수
·한국동양예술학회 이사
·한국서예학회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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