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걸수 수필가

손명순 여사가 이달 7일 96세의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김영삼, YS)이 서거하신지 9년이라는 세월은 흘렀지만, YS의 특유 화법으로 “닭 모가지는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 강한 메시지는 필자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을 것 같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YH 사건으로 국회의원 신분에서 제명 되었다. 이것이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급기야 10·26으로 이어져 박정희 대통령은 최 측근에 의해 최후의 날을 맞게 되었다. 이듬해 많은 시민들은 ‘서울의 봄’을 기대 했지만, 신군부 연장선인 제6공화국이 들어섰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3당 합당으로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이를 계기로 YS는 ‘문민 대통령’의 서막을 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1993년 2월 YS는 취임 직후 육사졸업식에서 잘못 된 군부를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한 달 후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전격 경질하고 이어 수경사, 특전사 사령관을 보직해임 하나회 수뇌부에 일침을 가했다.

YS는 취임초기 때만 해도 군(軍) 요직에 대부분 하나회 회원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이 시기 134명 하나회 괴문서가 나돌아 하나회 회원들을 긴장시켰다. 연이어 군 장성 승진인사 12명 중 하나회 회원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YS는 집권 초기 신군부의 하나회 인맥을 완전히 해체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취임 49일 만에 성공리에 마무리 했다.

1993년 8월12일 YS는 금융 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그 다음날 증권거래가 시작되자 전종목이 하안가로 전 금융시장이 술렁거렸다. YS는 출범 4개월 만에 특별 팀 세부안을 만들었고,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자본주의의 꽃은 바로 ‘금융실명제’라고 했다.

그리고 YS는 비장한 각오로 두 전직 대통령 처리에 올인 했다. 1995년 7월 문제 사안에 대한 담당검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외국사례를 들어 대통령께 보고했다. YS는 “성공하던 실패하던 쿠데타는 쿠데타”라고 소신을 밝혀, 여러 계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YS는 5·18 특별법 제정을 강행처리했다. 이에 맞서 1995년 12월2일 전두환은 5공 특별법 제정에 크게 반발 연희동 자택 앞에서 ‘골목 성명서’를 내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다음날 새벽에 전두환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는 사형과 무기수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요소도 만만찮다. 1993년 12월부터 2001년 8월까지 IMF 관리체제,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은 인재(人災)였다.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를 선언하고, 보란 듯 OECD에 가입, YS정부의 과시욕이 높았을 것이다. 금융자본의 통제장치 및 자본시장에 대한 철저한 대책 없이 수용한 게 시작의 원인이 아니었을 까. 대규모 실업과 구조조정, 중소상인들의 파산과 부도 등 충격과 피해는 말할 수 없었다.

또한 서해 페리호 침몰, 성수대교 붕괴, 충주호 유람선 화재, 대구 지하철 가스 폭발, 삼풍백화점 붕괴 등 사건사고도 많았다. 하지만 반전을 거듭한다. YS는 1995년 3·1절 기념식에서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겠다고 전 국민 앞에 약속했다. 일본은 총독부 철거비용을 자기네들이 부담, 총독부 중심부를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제안에 분노한 김영삼은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총독부를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런 추진력과 결단은 YS가 아니고선 누구도 엄두도 못 낼 일들이 아닌 가. 필자 생각에 YS 힘의 원천은 배우자에게서 나온 것 같다. 3당 합당 시 YS는 반대하는 최측근들에게 이 돌(머리)들아 라고 호통 쳤다. 돌아서 가는 측근들에게 손명순 여사는 “저기 큰 돌(YS)을 작은 돌들이 도와주면 안 되겠어요” 하는 유머에 다들 돌아섰다고 했다. 손 여사께 사후에 부쳐진 ‘내조9단’이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강걸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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