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목줄을 놓아버리면 개는 새가 될까
여름에는 멍청한 벌레를 그릴 거야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을 가르면
플라스틱 공간이 생겼다
용돈을 한꺼번에 써버리는 것
손톱을 물어뜯는 것
고쳐야 할 습관이었다
나 대신 반성하는 꽃을 그렸다
가위 바위 보를 하면
패배하는 청소년이 생겼다
숨거나 은밀해지는 순간이었다
오징어를 씹으면
턱이 서양 배우처럼 단단해졌다
외국 배우의 사진을 오려 벽에 붙였다
나는 코가 너무 낮았다
비틀스의 렛잇비에선 죽은 향나무 냄새가 났다
청소년은 쑥쑥 자라야 했다
나는 실패하는 법을 알았다
생일이었다

“어른, ‘실패’라는 한계를 알게되는 일”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1960년대 등장했던 ‘명랑’이란 잡지와 두통약 때문인지, 당시 인기를 누렸던 명랑만화 때문인지, 명랑이란 말에는 추억의 냄새가 난다. ‘그때 그 시절’이 명랑했는지와는 별개로.

이 시도 그때 그 시절인 청소년기의 여러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쓴 시이다. 추억의 장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쳐 간다. 돼지 저금통에서 용돈을 한꺼번에 써버리는 것으로, 고쳐야 할 습관으로, 반성하는 꽃으로, 패배하는 청소년으로. 낮은 코에 대한 열등감은 ‘내버려두라’는 70년대 유행하던 비틀스의 렛잇비로, 추억의 되새김은 ‘명랑’하게 이어진다.

청소년기의 냉소적 태도는 ‘밝고 환한’이란 명랑의 의미에 ‘썩소’를 날린다.

시인은 마침내 ‘실패하는 법을 알았다’고 한다. 반성과 패배가 쑥쑥 자라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 어른이 된다는 건 어쩌면 한계를 아는 일이 아닐까. 어른은 어쩌면 평생 어린아이로 남는 데 실패한 존재 아닐까.

이제 첫 행의 ‘개의 목줄을 놓아버리면 개는 새가 될까’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개는 목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으니 새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렇다면 저 반성과 패배가, 그러니까 ‘실패’가 의미 없는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송은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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