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수 무거제일경로당 회장

울산 근현대사 100년의 역사가 숨 쉬는 삼일회관이 사라질 운명에서 획기적으로 살아 남게 돼 문화재에 관심 있는 시민들은 안도의 숨을 쉬게 됐다.

그것은 구 울산 읍성이 도시 재개발 구역의 도시, 건축, 기록화 사업의 용역을 맡은 울산 역사연구소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다.

이 삼일회관의 내력을 다시 한번 조명을 해보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사회,여성, 노동, 교육운동의 큰 터전으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100년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북정동 B-4 재개발로 철거 위기 소식에 보존을 위한 각계각층 여론이 큰 만큼 원도심 문화 지키기에 지방정부가 앞장서야 한다.

삼일회관이 들어서기 전 이 땅에 1921년 낙성한 ‘울산청년회관’이 단아한 목조건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21년 2월 울산청년회를 창립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지역 유지들과 청년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건축하여 같은 해 11월에 낙성식을 가졌다.

이후 울산청년회관은 각종 강연회 강습 토론회를 열며 민족 계몽활동과 사회교육 공간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해영학원, 유치원, 노동야학을 운영한 민중 교육의 장소였다.

1923년 10월에 발간된 잡지 <개벽> 38호에 실린 울산기행문에 의하면 울산읍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이라고 그 위치를 매우 칭찬하며 소개했다. 야트막한 언덕에 위치해 지금처럼 높은 빌딩이 없던 시절 태화강 남쪽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이 울산청년회관이 들어설 때 앞에는 조선시대 울산 읍성 객사인 학성관을 개조해 개교한 울산 보통학교가 있었다. 옆에는 울산 군청(현 동헌), 울산법원, 울산 신사가 연달아 들어섰다. 그런 한복판에 들어선 울산청년회관은 울산지역 청년들뿐 아니라 울산 전체 항일운동에서 매우 상징적이고 위력적인 공간이었다.

여기서 대표적인 예로 ‘신간회 울산지회’가 창립한 곳으로, 1927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이 모두 결집했던 가장 큰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로써 울산지역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은 울산청년동맹 결성식을 할 때도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울산 건국 청년단(회장 김태근)이 사무실을 두고 사용했고 울산초등학교가 육군 32 병원으로 사용된 기간에는 학생들 임시교실로 이용했다.

지금처럼 삼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건축한 것은 1971년이다. 울산지역 거부이자 정치인이었던 고 고기업을 비롯해 시민들이 성금을 모았다고 한다.

신축된 건물은 1970~1980년대에 시민대학이 운영되었다. 저명인사들을 울산에 초청해 연 강연회 장소로 쓰였다. 적극적 회관 운영은 1979년에 설립한 울산 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석보)가 맡았다. 향토문화연구회는 울산 문화재 발굴과 향토문화 보존을 위해 매달 회원 답사와 순례를 이어갔다.

그런데 건물이 들어선 토지가 국가 소유로 넘어가고 현재 기획재정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되어있다. 그런데 건물은 건축 대장에 누락된 상태다. 이러한 역사를 아는 시민사회에서는 재개발로 철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보존과 계승을 제안해 왔다. 이런 황당한 가운데 2019년 시민단체(향토문화연구회 전 회장 김성윤)가 삼일회관 보존을 위한 운동을 벌려 1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접수하기까지 했지만, 확실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 현 향토문화연구회 김위경 회장(2023년)이 존치 운동에 사활을 걸어 왔던 것이다.

금번 천만다행으로 울산 역사연구소의 건축 기록화 일환으로 본회관 존치기록으로 남게 됨은 역사 기록의 한 획이 될 것이다.

최인수 무거제일경로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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