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총선에서 울산 갑구에서 출마했던 이수관씨는 국회의원 낙선 후 11~12대 범서면장을 지낸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다른 후보의 경우 면장을 지낸 경력을 앞세워 국회의원 출마를 한데 반해 이씨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된 후 면장을 두 번이나 했다.선관위 기록에는 출마 당시 나이 51세, 주소는 범서면 입암, 직업은 농업, 학력은 소졸로 되어 있고 경력은
조형진씨는 일제강점기 박병호, 강철과 함께 울산에서 가장 청년운동을 열심히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언론, 교육 분야에서 지도자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도 벌였다.그러나 그가 오랫 동안 울산사회에서 부각되지 못한 것은 6·25때 북한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가 월북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납북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 그는 울산에서 가장 열렬히
울산에서 2대 총선에 당선돼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던 오위영씨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그는 처음으로 중앙정치의 지도자가 되었고 특히 헌정 초기 울산을 민주당의 신파가 득세하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오씨는 민주당 정권 때는 장면 총리에 이어 민주당의 2인자로 활동했다.출마 당시 나이는 48세, 주소는 종로구 혜화동, 학력은 고오베(神戶) 상고 졸, 경력은 은행장
2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0년 5월30일 있었다. 제헌의원 선거가 미군정 하에서 미군의 주도로 실시되었던데 반해 2대 총선은 우리정부에 의해 치러졌다는 것이 특징이었다.2대 총선은 제헌의회에서 만든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210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그러나 개원 일주일 후 6·25가 일어나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이 납북되었고 또 국회가 피난지 부산에서
정인목(鄭寅穆)과 문창준(文昌俊)도 제헌의원 선거에서 울산 을구에 출마해 고배를 마셨다. 이들 둘은 낙선 후 사회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특이하게도 활동 내용은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특히 정 후보는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눈솔 정인섭(鄭寅燮)의 형으로 숙명여대와 경상대학 학장까지 지냈고 우리나라 상학계(商學界)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부친 아송(我松) 택하씨
제헌의원 선거 때 울산 을에서 출마했던 이완수 후보는 울산 흑색선전 1호 희생자다. 선거 기록물을 보면 출마 당시 나이가 47세, 학력은 중졸, 직업은 도청공무원으로 되어 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8300 여 표를 얻어 당선자 김수선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이 후보가 이처럼 부진한 성적을 보인 것은 투표 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190
해방 전후 상북면에서 오랫동안 면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경력을 쌓았던 김석한(金錫漢) 후보는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선거 운동을 하는 동안 사망하는 바람에 정치인의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다.본관이 안동인 김 후보는 출마 때 이미 58세로 12명 후보 중 나이가 가장 많았다. 주소는 상북면 양등리, 직업은 농업, 학력은 중졸, 소속정당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제헌 선거를 통해 울산 을구에서 당선되었던 김수선 의원은 정치적 야망이 컸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갑구의 최봉식 의원이 활발한 의정 활동을 펴지 못한데 비해 김 의원은 의회 활동과 관련, 많은 일화를 남겼다.초대 선거에 나섰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 주소는 서울특별시 신당동, 직업은 출판업, 학력은 사범학교 졸, 정당은 무소속으로 되어 있었다. 제헌선거에서
박곤수(朴坤洙)씨 역시 면장 경험을 살려 울산 갑구에서 제헌의원 선거에 도전했으나 국회의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대현면장을 무려 6년이나 지냈던 박씨가 출마할 때 나이는 51세, 주소는 대현면 여천리. 직업은 농업, 학력은 소졸로 되어 있다. 그는 최봉식과 변동조에 이어 3등으로 8000여 표를 얻었다.박씨가 면장을 지낼 때인 해방 전후만 해도 면장은 군
범곡(梵谷) 김태근(金兌根)은 제헌 선거 때 정치에 뜻을 두고 울산 갑구에서 출마했으나 중도 사퇴했다. 출마 당시 스물일곱살이었고 주소는 울산읍 성남동, 직업은 기자, 학력은 대학 중퇴로 되어 있다.대학은 일본 고야산(高野山) 대학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귀국하는 바람에 졸업을 못했다. 고야산은 오사카 남쪽 와카야마현에 있는 불교 성지다. 고야산 대학
제헌의원 선거 때는 전국적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들이 많이 후보로 나와 당선 되었다. 가까운 부산의 동래만 해도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로 항일운동을 벌였던 김약수가 조선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일제강점기 울산에서도 변동조, 조형진, 최현배 등 항일운동을 벌인 인물들이 많았고 이들은 해방 공간에서 자신의 정치 야망을 키우기 위해 선거에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는 제헌의원 선거 때부터 이루어졌지만 그 숫자는 극히 미미했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제헌의원 선거에서 여성 후보들의 출마가 일부 있었지만 당선자는 한명도 없었다.제헌의원 선거에서 여성 당선자로는 보궐선거에서 임영신 여사가 당선되었을 뿐이었다. 2대 총선에서는 임영신과 박순천 여사가 금배지를 달았다. 1898년 기장 출신으로 부산
울산에서 제헌 국회의원이 되었던 죽헌(竹軒) 최봉식(崔奉植)은 의정활동보다 일제강점기 일상(日常)이 더 많이 전해지고 있다. 죽헌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면장 직분을 훌륭히 수행했고 두 번째는 후세교육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고향인 온양면과 서생면에서 면장을 지냈다.서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167)년 5월10일에 실시된 제헌선거는 좌익계와 남북 협상파가 불참한 선거였다. 그러나 전국 유권자 780여만 명 중 750여만 명이 투표해 198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제헌의원 정수는 200명이었으나 선거 당시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2명의 의원을 선출하지 못했다.제헌선거에서 울산은 갑·을로 나뉘어 2명의 의원을 선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일송(一松) 김병희(金昞熙)도 정치인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지만 해방 후 첫발을 디뎠던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단체로 몰리는 바람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해방 후 좌우익 논쟁 속에서 희생됐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일송은 97세로 아직 살아 있다.일송은 컴퓨터 귀재로 요즘도 매일 컴퓨터를 치면서
지난 14일 울산MBC는 이례적으로 광복 70주년을 맞아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후예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학암 이관술의 딸 경환씨에게 렌즈를 맞추었다.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치열하게 펼쳤던 학암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의욕에 불탔지만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간부가 되는 바람에 그 꿈을 접어야 했던 불운의 인물이었다.이병주는 그의 소설
일제강점기에 이 나라 백성들은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잤지만 일부 친일파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숨쉴 공간이 없었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에게 이 땅은 감옥이었다. 따라서 독립운동가들은 자유를 찾아 만주와 상해로 떠나고 일부는 지하로 숨어들어 치열한 항일운동을 벌였다.해방후 이 나라는 500년 조선왕조에서 벗어나 민주국가 체제가 되었다. 민주국가에서 국정에
70여년 가까운 우리나라 현대정치사에서 울산 역시 영욕이 겹치는 정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울산은 의외로 2인자를 많이 배출했다.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는 범서 입암 출신의 이관술이 남로당의 2인자 역할을 했고, 자유당을 거쳐 내각제인 민주당 시절이 되면 장면 정권 아래서 언양 출신 오위영 의원이 2인자로 등장한다. 2대 울산에서 당선되어 4·19후 부산으로
울산의 정치사를 얘기할 때 시민들은 울산이 야당도시인가, 여당도시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이에 대해 적지 않은 울산시민들은 울산이 ‘야당도시’라고 말한다.울산은 실제로 오위영, 정해영, 최영근, 최형우 등 야당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다. 그러나 선거결과와 정치인맥을 보면 단순히 야당도시로 단언하는 데는 문제점이 있다. 정확히 얘기하면 헌정사 초기에는 여당도시였
20대 총선이 25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 유권자인 국민들은 여야 모두 매일 집안싸움만 하고 나라보다는 당리당략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권에 기대 할 것이 없다고 선거 자체에 무관심하지만 예비 후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선거전에 돌입했다.지난 23일 울주문화원이 개최한 두서면 활천리의 ‘전화앵제’에도 정작 이 지역 출신 강길부 국회의원은 축전 밖에 보내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