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젖줄기를 따라 펼쳐진 들판 중 가장 너른 곳이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 다개리(茶開里)다.

 고헌산 자락을 지붕삼아 넓게 펼쳐진 들판 속에 집들이 푸근하면서 여유롭게 안겨 있다. 다개리는 농사를 짓지 않는 가구를 다 포함하더라도 1개 가구당 논 경작면적이 20마지기(4천평)에 이를 정도로 곡창지대이다. 구획정리를 마친 들판에 모를 심는 이앙기, 트랙터들이 분주하다. 경작면적이 너른 만큼 첨단 영농기계들이 즐비하다.

 농기계를 보관하는 마을 공동 농기계 창고도 있다. 농기계 값이 3천만원대에 이르기 때문에 함부로 방치할 수는 없고 집집마다 창고를 갖추기도 어려운 사정을 고려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마련한 것이다. 창고는 늘 비좁다.

 축산과 대규모 영농을 하고 있는 김동식씨(61)는 "지난 2000년에 다개지구의 대구획정리 사업이 마무리 된 뒤부터 기계영농이 더욱 수월해졌다"면서 "다개리에서는 농사를 짓는다하면 7천~8천평은 기본"이라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농촌이 고령화로 인해 영농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개리는 40대가 15명이나 될 정도로 젊은이들이 영농을 이끌어 가고 있다.

 대규모 영농에 못지않게 거대 축산단지로도 명성을 얻고 있다. 전체 155가구중 47가구가 한우축산에 종사하고 있는 한우고급육생산시범단지다. 한우를 30마리이상 사육하는 농가만도 20여가구에 달하고 100마리 이상의 대형 사육농가도 2~3곳에 이른다. 올해초 장안부씨가 전국 최대우를 생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우축산이 이처럼 발달하게 된데는 언양불고기단지라는 대형 소비시장을 인근에 두고 있는 점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 주민들이 하나같이 마을을 공해와 오염으로부터 지켜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한몫했다. 이웃마을인 두서면 차리에만도 10여곳이나 이르는 양돈·양계장이 이곳에는 한곳도 없다.

 홍규식 다개리 이장(60)은 "농촌이 살아남기 위해 대규모 영농과 축산 등 특성화된 영농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서도 주민들의 소득을 늘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오염물질을 거의 배출하지 않는 한우를 사육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다개리의 축사들은 대부분 분뇨를 퇴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갖춘 톱밥발효축사들이다. 한우들이 톱밥과 분뇨를 짓이겨 놓아 발효를 촉신시키고 이렇게 만들어진 퇴비는 유기농에 활용된다.

 다개리는 155가구에 남자 222명 여자 225명 등 총 4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심마을 역할을 하고 있는 새마을(새말)과 칡덩굴이 많았다는데서 유래되는 갈밭(갈전), 움푹 꺼진 동네인 굼다개(굼닥), 고헌산 턱밑의 고래샘 등 4개의 자연마을로 법정·행정리가 같은 단일마을이다. 조선초기 예종1년(1469)에 발간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다개리라는 말이 쓰인 점을 미뤄 조선 건국직후부터 지금까지 500여년을 다개리라는 단일 지명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개(茶開)라는 지명의 유래에는 세가지 설이 있다. 고헌산에서 발원한 여러 골짜기의 거랑이 많아 다계(多溪)라 하던 것이 다개로 변했다는 설과 넓은 들판이라는 뜻의 다기(多基)에서 다개로 변했다는 설이 있지만 차나무 밭(茶田)을 개간하여 마을이 형성됐다는 다개가 가장 유력하다.

 굼닥은 다개리의 서남쪽의 가장 구석진 마을로 구렁진 곳의 굼턱이라는 말이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개리에서는 가장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로 못안고개를 경계로 상북면 지내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김일출씨(72)는 "농토야 그 어느 동네보다 넓지만 너른 만큼 농사 짓는다고 고생이 심하다"며 "농기계들이 워낙 비싼데다 쌀값이 싸 농사를 어지간한 규모로 지어서는 빚을 갚기 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새마을은 새말, 신리(新里)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가장 늦게 생겨났다. 새마을회관과 경로당, 정미소, 농기계공동보관창고 등이 위치한 중심지이다. 고헌산 바로 밑 일제시대에 조성된 공동묘지 등으로 들판 한 가운데로 가구들이 옮겨 오면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고헌산 입새에 지금도 조선시대 도자기 파편들이 많이 남아 있는 유적지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고래샘은 물이 잘 마르지 않는 고래샘이 있었다는데서 생겨난 말일뿐 실제 고래와는 무관한 이름이다. 고헌산에서 다개리를 가로 지르는 3개의 하천 중 가운데 골짜기인 연구골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갈전은 칡과 갈대가 밭을 이룰 정도로 무성했던 곳으로 조선시대 말기에는 상리와 하리로 구분돼 번성했다. 그러나 상리는 고헌산 화적들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진 뒤 하리만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미륵골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가로 지른다.

 풍족함에서 비롯되는 인심은 남다른데가 있지만 그만큼 배타적이기도 하다. 외지인들이 축사나 중소기업을 시도하기라도 하면 똘똘 뭉쳐 반대에 나선다. 그래서 지리적인 입지상은 중소기업이 많이 들어설 위치지만 삼성전관에 납품하는 길천(주) 1곳 밖에 없다.

 굼닥아래 산 중턱에 몇년째 방치되다시피 한 한솔전원주택단지는 골치덩어리이다. 산중턱을 파헤쳐 놓고 부도가 났기 때문이다. 최근에야 경매를 통해 새 주인이 나타났지만 진입로 등의 문제로 아직까지는 해결이 쉽지 않다. 현재 주소지를 이곳으로 옮겨 놓은 가구는 10여가구에 이르지만 실제 거주는 3~4가구 뿐이다. 동네주민들과 교류가 거의 없는 사각지대이다. 최석복기자 csb7365@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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