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을 보면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될 때가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의 정기를 어떻게 그렇게 읽어내는지 신통하기만 하다.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의 신복(新卜)마을과 신안(新安)마을도 그 이름이 아깝지 않다. 새로운 마을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면서 복된마을이라고 하고 편안한 마을이라고 했던 것이 오늘에 와서 그대로 들어맞고 있다. 요즘 농촌에 가면 다들 농가부채 때문에 못살겠다는 한탄이 이어지지만 이들 두 마을은 주민들 스스로 "잘사는 마을"이라고 말한다. 마을 이름 그대로 복되고 편안한 마을인 것이다.

 신안마을은 새마을 사업이 성공한 대표적인 마을로서 지금도 이웃마을들이 부러워할 만큼 마을 전체가 부유하다. 어느 집이든 한집을 골라 들어가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수 있다. 집집마다 넓은 마당에 축사를 갖고 있고 그 곳에는 선한 눈빛을 한 소가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다. 대개 한 집에 20~50마리씩이나 된다. 마을 전체로 보면 모두 300마리는 넘는다. 마을 한켠에는 돼지 축사도 있다. 마을 주민이 아닌,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 사육하고 있는데 4천여마리나 된다. 그래서 사실상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는 마을전체에서 외양간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러나 이 마을 주민에게는 그 냄새조차 구수하다. 30여마리 소를 돌보고 있는 김효원씨(58)는 "소가 재산인데 냄새라뇨"라며 "아무 냄새도 안납니다"라고 말했다.

 신안마을의 참으로 어렵게 시작됐다. 광복 후 오갈데 없는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정부가 천막촌을 만들어주었던 것이 마을 역사의 첫 페이지다. "귀한동포마을"로 불려지면서 가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마을이었다. 일제 때는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던 서천농장과 풍전농장이라는 커다란 농장이 두개나 있었다. 오늘날 울산배의 명성을 안겨다준 배나무에서부터 봉숭아 사과 포도 무 고구마 감자 등 없는 것이 없었으나 그들이 떠난 뒤 그것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탓에 농장은 풀밭으로 변해버렸다. 그 풀밭 위에 귀환동포를 위한 천막촌이 조성된 것이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땅을 일구어 무엇을 생산해낸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한둘 떠나고 겨우 30채쯤 남았을 때 정부는 다시 2차로 정착민을 모집하고 인근 산의 나무를 배어내 집을 짓도록 했다. 다시 전국적으로 새마을사업이 전개되던 해 신안마을은 상천마을에 이어 경남도 새마을운동 홍보마을로 지정되면서 본격적인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었다.

 도로는 넓고 반듯하게 내고 15평의 집은 A, B형으로 24동을 지었다. 건물은 작지만 집집마다 넓은 축사를 두도록 했다. 상천마을이 덴마크 식을 본따 집을 마당없이 부채꼴로 다닥다닥 붙여 짓고 마을 앞에 공동작업장, 마을 뒤에 공동축사를 지었던 것과 달리 신안마을은 우리 농촌의 실정에 맞추어 각자 복합영농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마을"로 알려지면서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로 여러 농촌에서 견학을 오는 곳이 되었다. 75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다녀가고 시멘트 700푸대를 보내 주민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0가구에 불과하던 가구수는 91년 57가구로 늘었고 2002년에는 72가구로 증가했다.

 3세 때 부모의 손을 잡고 이 마을에 발을 들여논 우상용이장(61)은 "60여년 신안마을의 역사는 주민들의 피와 땀"이라며 "외양으로 보면 그저그런 농촌 같지만 실속을 들여다보면 경제·문화수준이 인근 농촌에 비해 월등히 앞섰다"고 말했다.

 신안마을에는 요즘 또하나의 기쁨이 찾아왔다. 김태원씨(55)의 딸인 김성은양이 외무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마을 입구에 커다랗게 플래카드도 내걸고 온 주민이 함께 기뻐하고 있다.

 현재의 안락이나 기쁨이 모두 그들이 몸소 일군 것이기에 이들은 언제나 당당하다. 경로당에 모인 할머니들은 젊은 시절에 쌀이 없어 마지 못해 먹었던 수제비를 이제는 별미 간식으로 끓여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다. 천막세대인 고외숙 할머니(78)는 "배급받아먹고 살 때야 못죽어서 살았지"라면서 "그 때 비하면 지금 천배 만배 잘 산다"고 말했다.

 상천리에서 자연마을이라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생각되는 신복마을은 예부터 부촌이었다. 농토가 많고 물이 풍부해 농사가 잘 됐기 때문이다. 박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동족촌처럼 모여살며 이웃간의 인정도 많았다. 그런데 쌀값이 말이 아니게 된 10여년전에는 마치 마을이름이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오로지 논농사만 바라고 살았던 탓에 변해버린 현실을 헤쳐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91년에만 해도 당시 박상건 이장은 "새마을 운동의 영향도 적게 받았고 경부고속도로에 갇혀 공장도 못들어오는 탓에 온식구가 매달려 1년 농사를 지어봤자 회사원 반년치 월급 밖에 안된다"고 한탄을 했었다. 산간오지도 아닌데 마을에는 빈집도 생겨났다.

 그러나 의외로 그런 고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을에 작은 공장들이 한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공장에 가서 작지만 벌이를 하고 논농사는 점차 결명자도 하고 과수원도 하는 밭농사로 바뀌어 소득도 높아졌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생겨나 가구수도 91년 58가구에서 2002년 77가구로 늘었다. 이임재이장(53)은 "노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자연마을로 가을에 수확물이 있으며 집집마다 나누어 먹는 인정이 살아있는 살기좋은 마을"이라고 말했고 최필도 할머니(70)는 "남에게 빌리러 가는 사람 없는 부촌"이라며 자랑했다. 글 정명숙기자 jms 사진 김경우기자 wo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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