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읽는다 - (16) 선덕여왕

▲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여왕이지만 재임 기간 내내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는가 하면 내란까지 겹쳐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의 무덤은 현재 낭산 사천왕사지 위에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국내외적 도전 시달려 정사에 어려움

천성적 어짐과 지혜로 선정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 받아

공주시절부터 3명의 남편 두었으나 후손은 보지 못해

선덕여왕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나 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왜 결혼을 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변부터 하자면 선덕여왕은 결혼을 했을 뿐 아니라 그것도 3명의 남편을 두었다.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 왕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천성적으로 태어난 어짐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여왕은 어릴 때부터 지혜가 뛰어나고 영민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한다.

일반적으로 여왕은 시집을 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따르면 여왕은 공주 시절에 김용춘과 결혼했고 이 때문에 용춘의 아내였던 천명공주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여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자식을 갖지 못하자 용춘은 남편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 때 신하들은 삼서제도에 따라 흠반과 을제를 동시에 왕의 남편으로 삼았다. 용춘, 흠만, 을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될 때 모두 유부남들이었지만 여왕이 그들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은 본 부인을 버리고 여왕을 받들어야 했다.

▲ 황룡사 9층탑은 선덕여왕 재임동안 건립되었는데 황룡사 건립의 총 책임자가 무열왕의 아버지였던 용춘으로 알려져 있다. 황룡사지 전경.

선덕여왕은 이처럼 3명의 남자를 얻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의학적으로 보면 불임의 요인이 선덕여왕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신라는 선덕 이후 진덕·진성을 합해 모두 3명의 여왕을 가졌다. 그런데 신라의 여왕제도는 인근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이고 중국에도 없어 선덕이 왕위에 오르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중국은 측천무후가 고종을 이어 여황이 되는데 시기적으로 보면 이때가 선덕여왕이 왕이 된 후 30여년이 지나서다. 신라에서 여왕이 나온 것에 대해 가장 싫어했던 사람은 당시 중국 황제 이세민이었다. 이세민은 근본적으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해 선덕여왕이 왕이 된 후에도 3년 동안 봉직을 내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라는 여왕이 봉직을 받을 때까지 계속 사신을 보내었고 조공을 올렸다.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여왕사의 개척자다. 개척자는 항상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선덕여왕도 마찬가지로 당시 신라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때 어려움에 처한 여왕을 도와 준 인물이 김유신과 김춘추 그리고 자장율사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선덕여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지혜를 발휘했다. 그가 얼마나 지혜로운 왕이었나 하는 것은 모란도와 여근곡 그리고 도리천 등 소위 ‘선덕여왕의 지기 삼사’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기삼사는 여왕을 미화하기 위해 과장법이 동원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외에도 영묘사를 무대로 역졸 지귀와 나눈 사랑의 얘기는 여왕 역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여왕은 말기에 믿었던 신하의 반란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이 난이 평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어야 했다.

여왕은 재임기간동안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비담의 반란도 이 때문에 일어났다. 여왕은 즉위 후 건강이 좋지 않아 정사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는 자주 침범해 백성들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때 여왕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었는데 당 태종이 사신에게 ‘신라는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업신여기고 도적들이 끓는다’는 얘기를 했다. 이 말을 들은 비담과 염종의 무리가 647년 왕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난을 일으켰다. 난이 일어났을 때 비담은 상대등 자리에 있어 백성들로부터 명망이 높았고 이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이 난에 가담했다.

이 때 비담 일파는 명활산성에 군을 주둔시킨 후 내란을 일으켜 서라벌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지만 김유신과 알천 그리고 김춘추의 활약으로 비담이 붙잡히고 난이 종식되었다.

여왕이 재임하는 동안 안팎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여왕은 분황사와 영묘사를 창건하고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여왕의 능은 낭산에 있다. 이 능에서 동편으로 나 있는 보문들 넘어 아버지 진평왕릉이 보인다. 지형적으로 보면 아버지 진평왕의 능이 평지에 있는데 반해 여왕의 능이 산위에 있기 때문에 여왕의 능이 더 높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이는 진평왕릉이 너무 초라하다. 능 주위면 반드시 있기 마련인 송림마저 없어 흡사 보문들에 버려진 형국이다. 여왕이 재임 때만 해도 이 능은 아름답게 꾸며지고 잡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었을 것이다.

진평왕은 딸 선덕여왕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국내외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특히 당나라는 진평왕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선덕여왕을 왕으로 승인했고 이 후에도 여왕이 신라를 다스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이렇게 보면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아버지보다 사 후 높은 자리에 누워 허술한 아버지의 무덤을 지켜보아야 했을 여왕의 마음이 편치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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