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공부하는 노인들
① 한글교실을 찾는 노인들

“길거리 간판 읽고 싶어” “은행 업무 스스로 해결 원해”
우리글 깨치고픈 이유는 달라도 배움 열정은 모두 같아
지자체.복지관 등이 마련한 '한글교실' 노인 발길 줄이어

#1 - “벌써 한 시다, 한 시! 핵교 안가나.”

울산시 북구 창평동에 사는 장설자(69) 할머니는 매주 화요일 오후 1시면 밭을 매다가도 얼른 나갈 채비를 한다. 오후 2시 인근 주민자치센터에서 열리는 한글교

▲ 북구 농소1동 주민자치센터에서 노인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실 때문이다. 처음엔 탐탁치 않아하던 남편도 요즘은 시간을 알려주며 응원한다. “마누라가 멸치액젓 병에다 ‘멸치액젓’이라고 쓴 게 그리 감격스러웠는지 요새는 결석을 할라해도 할아범 눈치 보여서 못한다카이.” 장 할머니가 한글교실을 빠질 수 없는 변명(?)이다.

#2 - “손자가 몇 년 전에 준 편지를 이제야 읽었어요. ‘할머니 사랑해’라고 적혀있었네요.”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김모(71) 할머니는 한글교실에 다닌 뒤 이제 더듬더듬 편지를 읽는다.

‘할머니 사랑해’란 여섯 글자를 깨우치기 위해 지난 3월부터 한 번도 한글교실을 결석하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배우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이 컸는데 지금은 더 빨리 용기를 내지 못한게 부끄럽다”며 손자에게 쓸 답장을 준비했다.

◇더 이상 까막눈은 싫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한글교실’이 인기다. 이렇게 한글교실이 인기 있는 이유는 바로 ‘한글’에 대한 노인들의 열정 때문이다. 전쟁, 가난,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공부의 시기를 놓쳐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노인들이 늦깎이 공부를 위해 한글교실을 찾는 것이다. 북구청 평생교육과 이선애 계장은 “한 주민자치센터에는 20명 정원으로 한글교실 신청자를 모집했지만 37명이 몰려 결국 반을 나눴다”며 “어르신들의 배움의 열기가 젊은이보다 대단하다”고 전했다.

▲ 한글교실에 참가한 노인들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한글교실의 노인들은 하나같이 “이제라도 글을 읽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북구 농소1동 주민자치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백금화(71) 할머니는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글공부를 할 여유가 없었는데 이제라도 길거리의 간판을 읽고 싶은 마음에 한글교실을 찾았다”고 했다. 특히 글을 몰라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노인들이 한글교실의 문을 두드린다. 울산광역시노인복지관 조현아 대리는 “관공서나 은행에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한글을 배우는 어르신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또래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한글교실을 수강하는 노인들이 있다.

지난 7일 북구 농소1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열린 한글교실에는 20여명의 노인들이 출석했다. 이들 중 3명이 할아버지, 나머지는 모두 할머니다. 10명 남짓한 노인들이 두개의 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받는다.

대부분 65세 이상의 고령이지만 배움의 열정 앞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수십 년, 혹은 아예 하지 않았던 공부를 하는 게 쉽지 않은데도 다들 초롱초롱한 눈으로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 날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펴낸 책 ‘소망의 나무’ 말고도 각자의 이름과 나이, 주소를 외우는 시간을 가져 일상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수업의 주를 이뤘다. 이곳에서 자원봉사로 한글을 가르치는 이은주 강사는 “읽기는 어느 정도 되지만 쓰기가 부족한 어르신들이 많다”며 “레크리에이션 등 즐겁게 한글을 익힐 수 있는 방법으로 교육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글교실로 인도는 자식세대 임무다= 현재 울산에서 운영되고 있는 한글교실은 대부분 각 지역의 노인복지관이 운영한다. 지자체 중에서는 북구청 평생교육과가 처음으로 노인들을 위한 ‘찾아가는 한글교실’을 개설해 해당 지역 주민자치센터 및 문화센터 10곳에서 지난 3월부터 무료로 열고 있다. 이 밖에도 노인 대학, 종교단체, 야학 등 다양한 곳에서 ‘배움에 목마른’ 노인들을 위한 한글교실을 운영한다.

노인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한글교실을 찾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배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김정수 자원강사는 “특히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한글교실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며 “아들, 딸들이 직접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한글교실에 오는 건 어떨까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부끄러워하는 노인들에게 자식세대가 적극적으로 한글교실을 추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글교실에 대한 지원을 확대해아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무궁화 야학을 꾸려가는 남병희 교감은 “어르신들은 아직도 야학을 찾는 분들이 많다”며 “국가와 지역사회가 발 벗고 나서 노인들의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킨다면 야학이 필요없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라며 지역사회의 적극성을 강조했다. 박소영기자 sysay@ksilbo.co.kr

‘멋쟁이 어르신’을 소개합니다
“마음은 모두 열일곱 여고생”

칠순 넘은 한글교실 강사 김유례 할머니
누구보다도 또래 노인학생들 잘 이해해
읽기 쉽게 글자 확대, 옛 동요도 함께 불러

“여기 늙은이가 어디 있나요? 모두 마음만은 열일곱 여고생이랍니다.”

대부분의 한글교실은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노인들을 가르친다. 그런데 울산광역시노인복지관(남구 삼산동) 한글교실은 조금 특별하다. 김유례(72) 할머니가 강사다.

“원래 시 창작이 취미입니다. 어렸을 적엔 문학소녀였고요. 결혼을 하고 주부가 되어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뭘까 생각하다가 1995년 울산여성회관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유례 할머니는 봉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요즘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한글교실을 찾은 대부분의 노인이 읽기와 쓰기에 서툴다는 사실을 알고 한글교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또 늦깎이 공부를 하는 노인들의 영향을 받아 자신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용기도 덤으로 얻었다. 그래 김 할머니는 평소 즐기던 시 창작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경주문예대학에 입학해 2004년 수료했다. 또 창작시로 등단해 경주문인협회에 정식으로 등록도 했다.

김 할머니의 공부에 대한 열정이 김 할머니를 울산광역시노인복지관에서 한글교실 강사로 모시게 했다. 울산광역시노인복지관 조현아 대리는 “젊은 강사도 써 보고, 교육학을 전공한 강사도 써 봤지만 김 할머니만큼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성실히 가르친 강사는 드물었다”고 김 할머니의 열정을 전했다.

현재 김 할머니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열다섯 명 안팎. 이들은 60대에서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이지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다. 학생들 중에는 그때 그 시절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제대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

“남창에 사는 어르신 한 분은 일부러 삼산동까지 와서 공부를 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부끄러운 것이죠. 하지만 글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엇비슷한 나이도 노인들을 더욱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이 노안입니다. 기존의 책들은 글씨가 작아서 무리가 있어요. 저도 그 마음을 잘 알고요. 그래서 제가 직접 동화책을 확대 복사해 교재로 쓰고 있습니다. 또 어릴 적 흥얼거리던 동요의 가사도 가져와 함께 부르기도 합니다.” 박소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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