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북부순환도로를 타고 북구 강동동 정자방향으로 가는 고개를 넘어 평탄한 길로 접어들면 오른쪽으로 논밭이 펼쳐지고 신전마을, 명촌마을, 주렴마을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정자사거리를 조금 못가서 왼편에 위치한 강동중학교 왼쪽 비탈길을 50m정도 올라가면 보이는 것이 죽전마을이다.

 깊은 골짜기를 중심으로 오른쪽 편에 슬라브를 얹은 집들이 몇 채 눈에 띈다.

 하지만 폐허로 변한 기와집과 공터도 몇 군데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에는 10여개의 가지가 잘려나간 소나무가 위태롭게 서 있는 등 곳곳에서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곳이 바로 70년대까지만 해도 13가구가 이마를 맞대고 오손도손 모여 살던 울산김씨(蔚山金氏) 학암공파(鶴庵公派)의 집성촌.

 인근 명촌마을, 달곡마을, 주렴마을에도 울산김씨들이 살고 있다.

 울산김씨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두번째 아들이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를 넘기려 해 이를 거세게 반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인 일(鎰:마의태자)을 따라 개골산(금강산의 겨울이름)으로 들어갔다.

 이후 해인사에 들어가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고 하지만 후세에 자세히 전해진 바가 없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울산김씨족보(蔚山金氏族譜)"에는 김덕지가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후 덕지의 14세손인 환(環)이 고려조에서 삼중대광광록대부(三重大匡光祿大夫)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학성이라는 지명이 울산에 있는 것을 보고 본관을 울산(蔚山)으로 하게 됐다.

 17세손 비(秘)는 조선초기 왕위계승을 둘러싼 태조 이성계의 왕자들 사이의 분쟁인 "왕자의 난"을 피해 1404년(갑신년)에 울산 강동의 피란골로 들어와 국가의 식읍을 받으며 살게 됐는데, 그가 바로 강동 일대에 터를 잡고 있는 김씨들의 입향조인 셈이다.

 한편 비의 형인 온(穩)이 조선 태종때 부인 민씨의 사촌처남들에 연루돼 죽게되자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 마을로 피하게 됐는데 그 후손들은 온의 호(號)인 학천(鶴川)을 따르게 됐다.

 따라서 울산김씨는 전라도 장성을 중심으로 학천공파(鶴川公派), 울산 강동을 중심으로 학암공파(鶴庵公派)로 나뉘어 세를 이어오게 된 것.

 울산 중구 다운동에 살고 있는 37세손 김형순씨는 문중들 자랑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불가항력적인 역사의 흐름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선조 25년인 1592년 4월14일 일본의 칸파쿠, 토요토미가 육군 14만명, 수군 8천명을 이끌고 부산포와 서생포를 공격하는 왜란을 일으키면서 울산김씨 문중들이 수난을 겪기도 했다는 것.

 김형순씨는 "당시 만호(萬戶)진이 있던 서생이 초토화되면서 이곳을 주거지로 하던 많은 문중들도 죽었다"며 "왜 하필이면 왜군이 서생으로 들어왔는지" 라고 말하고는 다음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제실(帝室) 안 대들보 위로 온전히 보존된 태극문양을 설명하면서 형순씨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일본인들은 조선을 강점하면서 태극문양이 보이는대로 깨부숴버렸는데 죽림마을의 제실은 당시 유림들이 지키고 있어서 이를 겁낸 일본인들이 접근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린시절 뛰어놀던 낮은 구릉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형순씨는 "주렴마을에 30여호, 명촌마을에 20여호, 죽전마을에는 3가구만이 남아 있으며 이곳 강동에는 현재 70여호만이 띄엄띄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는 170여 가구가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살았지만 70년대 이후 급속한 개발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하나 둘 타지역으로 이전했다는 설명이다.

 지금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농사를 짓거나 조그만 자영업을 하고 있다.

 형순씨가 자란 피란골 우측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펼쳐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가지가 많이 잘려나가 있고 이마저도 비탈면에 철골 지지대로 받쳐져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와 보였다.

 형순씨와 함께 죽전마을에서 자란 형조씨는 "이 소나무는 1404년 입향조 비(秘)가 이곳에 정착해서 후손들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울산 김씨 세전송(世傳松)"으로 지정해 보호한 것으로 수령이 600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 안다"며 음력정월과 10월에 소나무 밑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하지만 속리산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과 함께 수령 600년 된 이 소나무가 문화재 등록은 커녕 제대로 관리도 안되고 있어 안타깝다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한편 울산시는 지난 3월4일 동구 일산동의 풍어제인 "당제(堂祭)"를 무형문화재로, 북구 달천동의 "달천철장" 등 4개소를 기념물로, 강동 하암 주상절리를 문화재 자료로 지정했으나 이 소나무는 향토성이 부족하고 학술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현재 "활만송"으로 불리는 이 소나무는 남정자마을의 보호 아래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노년을 외롭게 보내고 있다.

 울산지역에는 모두 361가구 1천여명의 울산김씨가 흩어져 살고 있다.

 학암공파로 이 마을 출신인 36세손 호식씨는 학성고 초대교장을 지냈고 같은 36세손인 인달씨는 병영농협장을 지냈으나 지금은 모두 공직에서 퇴임했다.

 36세손인 판조씨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부산에서 개인병원을 경영하고 있다.

 37세손 정환씨는 서울 경희대학교에서, 37세손 경민씨는 경기 아주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37세손 형구씨는 울산 중앙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등 문관의 후예답게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문중들이 많이 있다.

 농소1동 동장을 맡고 있는 경재씨도 38세손으로 한 집안이다. 김병우기자 kbw@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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