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성장의 시작-국도 7호선시대(36) (2) 교원노조와 김성모

울산, 1960년 정부에 교원노조 결성 촉구
중등교원노조, 농고생 반발로 활동 무산

수재에다 부잣집 아들이던 만원 김성모
강직한 성품 초등교원노조 위원장 맡아

1년 넘게 수감 중에도 노조활동 계속해
출감후에도 복직 않고 해직교사들 돌봐

4·19혁명 후 장면 정권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각 사회단체가 봇물처럼 쏟아 내는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었다.

교원노조도 이들 단체 중 하나였다. 자유당 시절에도 교사의 권익을 옹호하는 교직자 단체인 대한교련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단체가 제 역할을 못하자 4·19로 학원 질서가 혼란해진 틈을 타 교원노조 결성문제가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다. 교원의 권익을 옹호하고 학원 민주화 슬로건을 내건 이 운동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다.  

▲ 만원 김성모 생가. 만원 선생은 60년대 초 우리나라 교원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교원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5·16으로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현재 울주군 두동면 신기리에 있는 그의 생가에는 그의 인척이 살고 있다.

특히 경남과 경북은 교원노조 운동이 강렬해 경남은 당시 교원의 90%가 노조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장면 정부는 교원노조 활동이 미칠 악영향을 생각해 노조활동을 금했다.

울산에서 교사들이 교원노조 결성을 정부에 촉구한 것이 1960년 7월3일이었다. 이날 울산초중고 교원노동조합원 700여명이 제일중학교 교정에 집결해 장면 정부가 교원노조 활동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모임에서 중등교원노조는 교원의 권익을 위해 울산에서 5명의 교장이 자진 퇴진해 줄 것을 요청했다. 5명 중에는 울산농고 황오윤 교장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황 교장은 당시 울산농고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아 농고 학생들은 오히려 교원노조를 반대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당시 울산농고 학생이었던 김관 울산중구문화원장(70)은 “당시만 해도 황 교장이 울산농고학생들과 교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원 노조가 황 교장을 몰아내려 한다는 소문이 교내에 퍼지자 학생들 사이에는 오히려 교원노조를 해체해야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교원노조 모임이 열린 사흘 후인 6일 울산고등학교 학생 200여명이 교원노조를 지지하는 데모를 벌였다. 그러자 그동안 교원노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200여명의 울산농고 학생들이 울산고등학교로 몰려가 학교 주변을 포위한 채 학교 기물을 파괴했다. 당시만 해도 울산고등학교는 목조 임시건물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학교 건물을 파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들은 학교 건물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대항했던 울산고교 3년생 김일만(20)군을 집단 폭행해 전치 3주를 요하는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건물을 부순 농고 학생들은 곧장 인근에 있는 제일중학교로 가 차재준 선생을 만났다. 차 선생은 민주당 시절 울산읍의회 의장을 지냈던 차용규의 아들로,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울산제일중 교사로 있으면서 중등교원노조 위원장으로 활동 중이었다.

당시 울산제일중학은 현 울산교회 자리에 있었는데 학교 뒤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울산농고 학생들은 차 선생을 이 운동장으로 불러내어 교원노조 해체를 요구했다.

당시 학생들의 요구가 얼마나 거세었던지 차 선생은 이후 교원노조 활동을 중지했고 이 때부터 중등교원노조는 사실상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전화위복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후 일 년도 되지 않아 5·16이 일어나자 계엄군은 교원노조 간부로 활동했던 교사들을 모두 잡아들였지만 다행히 울산의 중등교원노조 간부들은 노조활동을 벌이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다.

중등교원노조가 이처럼 활동을 중단한데 반해 만원(晩洹) 김성모(金城模)가 이끄는 초등교원노조는 부산과 대구에서 열린 대규모 교원노조 집회에 참석하는 등 이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다.

교원노조 위원장으로 활동할 당시 만원은 울산초등학교 교무주임이었다. 이 학교 교장은 전 국회의원 최병국의 부친인 최두출이었고 교감은 고 이후락의 매형인 윤진하였다. 울산초등학교는 학교의 역사는 물론이고 교사와 학생 수로 볼 때 울산을 대표했다. 최 교장은 만원을 좋아했는데 그의 강직한 성격을 걱정해 그가 노조위원장이 되는 것을 만류했다.

만원이 교원노조 위원장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그가 자란 집안환경과 명성이 큰 작용을 했다. 그의 부친은 한의로 한문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만원은 어릴 때부터 유교적 가풍에서 자라 성격이 올곧았다. 따라서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선비의 기질을 가졌던 그는 당시 교원노조 활동이 옳다고 생각해 최 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만원은 두동면 은편 출신으로 두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언양중학교 전신인 언양공립학교로 진학, 재학 중 교사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단에 섰다.

당시만 해도 우리사회가 산업화되지 못해 대학을 졸업해도 마땅히 들어갈 직장이 없어 교직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따라서 중학교 재학 중 교사임용고시에 합격해 16살의 나이에 교단에 섰던 만원은 교사들 사이에 수재로 통했고 주위 젊은이들이 그를 부러워했다.

그가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부친의 재력도 큰 작용을 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울산 대현면에서 한의원을 운영했다. 그가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 교육계는 고위층의 인사전횡과 부정부패로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부형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시점에 노조위원장으로 용감히 앞장섰던 그를 주위 교사들은 유력한 교육감 후보로 보았다.

그러나 5·16은 그의 운명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다. 군사정권은 교원노조가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것을 빌미로 용공세력으로 몰아 노조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는데 이 때 체포된 자가 무려 1500명이나 되었다. 만원이 울산에서 활동한 50여명의 교원노조 간부들과 함께 계엄군에 이끌려 울산경찰서에 수감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는 울산경찰서에 수감된 후 제대로 재판도 받지 못한 속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울산경찰서에 있는 동안 병보석으로 구호병원에 입원했다. 이 때 면회를 갔던 그의 동생 성제(70)는 “제가 경찰서로 갔더니 형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형 주위에는 경찰관 2명이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나는 형님이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경찰의 감시를 보고 형이 쉽게 석방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생의 예견대로 만원은 쉽게 풀려나지 못하고 일 년이 넘어서야 석방되었다.

그가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노조운동을 계속했고 다른 노조원들보다 먼저 풀려나는 것을 죄스럽게 생각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출옥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정권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직된 교사들을 모두 복직시켰다. 그러나 만원은 자신이 다시 교직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동안 노조 활동을 스스로 옳지 않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된다면서 끝까지 교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출감 후 그는 성남동 동아약국 옆에 ‘화신스크린’이라는 프린트사를 차렸다. 이곳은 해직 교사들이 밤낮 없이 찾아오는 바람에 해직 교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해직 교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그의 가족들의 생계를 돌보는 바람에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던 많은 재산을 이 무렵 모두 날렸다.

당시 이 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울산대학 총무과장 출신의 이상군(65)은 “김 선생은 성남동에서 사무실을 운영할 때까지도 매일 경찰의 미행을 받았다”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가족보다는 동료 해직 교사들의 생활비를 더 걱정해 많은 돈을 썼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부산으로 가 경남도청 앞에서 필경사로 일했고 한동안 서울로 가 인쇄업을 했으나 직업인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당시 그가 서울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이 축구왕 최성곤의 동생 최민곤이었다. 둘은 두주불사였는데 울산에 있을 때는 경주에 가 술을 마실 때가 많았다. 둘이 경주 형산강에 배를 띄워놓고 고급 안주를 시킨 후 하루 종일 통음했다는 얘기는 지금까지도 울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자신과 함께 교원노조 활동을 했던 교사들이 모두 학교로 다시 돌아 간 후에도 결코 복직을 거부했던 그는 나중에 성남동에서 서실을 운영하다가 2000년 73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두동면 은편리 신기에 있는 그의 생가에는 현재 그의 먼 친척이 살고 있고 그의 동생 성제는 고향 두동에서 선산을 지키면서 엘크사슴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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