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 - (8)처용의 이슬람상인 피난민론

▲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지난 2012년 10월 5일 처용문화제의 일환으로 처용학술제를 개최했다. 여기서 한양대학교 인류학과 이희수 교수가 ‘글로벌 역사흐름으로 본 처용의 재조명’을 발제했다. 대체의 윤곽은 처용을 이슬람에서 온 상인으로 해석한 기존 이용범, 정수일의 논지를 그대로 따랐다.

그는 두 선학의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운포에 나타난 처용과 그 가족을 중국 당나라 말기에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중국에서 신라로 이주해 온 이슬람상인 일행이라 했다. ‘처용의 이슬람상인 피난민론’(이하 피난민론)이라 할 것이다. 그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기존의 연구성과를 동원하고,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자료도 제시하여 주목을 끌었다. 이슬람의 전래 서사시 〈쿠쉬나메〉가 그것이다.

中 양주 기점 동북아교역권-남해무역권 공존론 토대로
‘황소의 난’ 피해 이슬람상인들 신라로 피난왔다는 추측
근거로 제시하는 ‘쿠쉬나메’ 사료로 타당성 검증 안돼
이슬람 의학으로 역병(천연두) 치료 주장도 근거없어

◇피난민론의 개요

이교수의 ‘피난민론’은 기왕의 이용범, 정수일의 ‘처용-이슬람상인론’에 대한 연구자들의 비판을 극복하지 못한데다 입증자료 〈쿠쉬나메〉의 사료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논지 전개에도 연구방법론상의 허점이 드러나고 있어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고 있다. 이 글은 이 ‘피난민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이교수의 ‘피난민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845년 경까지 중국 양주를 기점으로 하여, 산동반도-한반도-일본을 연결하는 동북아 교역은 청해진의 장보고 해상세력이, 양주-광주-동남아를 잇는 남해 무역은 이슬람상인들이 관할하는 체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양주를 중심으로 장보고 세력과 이슬람상인 세력이 일종의 해상협정을 맺고 상권 보호, 이익 배분의 체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846년(신라 문성왕 8년)에 장보고가 피살되면서 청해진은 쇠퇴해 갔고, 이로써 동북아 교역권이 공백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를 이슬람상인들이 접수하면서 이들이 신라에 직접 진출하게 되었다. 이슬람상인들의 신라 진출을 기록한 아랍어 문헌기록이 등장하는 시점이 이 시기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 문헌기록이 바로 〈쿠쉬나메〉이다.

이렇게 이슬람상인들이 신라로 진출한 후 약 30년이 지나 중국에서 황소의 난(875~884)이 일어났는데, 산동성에서 발생하여 하남·강서·복건·광동·광서·호남·호북 등으로 파급되었다. 아랍인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동해안 지역에서 아랍-페르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외국상인 12만명이 죽었고, 20만명 이상이 살아남거나 도망했다.

도망한 이슬람 상인들은 ① 중국 내륙으로 도망하여 중국에 동화되거나, ② 동남아 지역으로 도망하거나, ③ 신라로 피신하는 등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다. 처용이 울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은 바로 ③의 경우이다. 항주와 양주 등으로 확산된 반란과 대학살 과정에서 해상에 정박해 있는 배를 타고 이웃 신라로 피신했던 것이다. 처용이 879년(헌강왕 5년)에 울산에 도착한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닌, 황소의 난이 빚어낸 필연이다.

당시 이슬람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과 의학 지식을 보유했으므로 처용도 역병과 같은 천형의 질병을 다스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고, 그의 처방전은 민간에서 널리 성행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처용은 신라에서 자연스럽게 질병을 쫓아내는 수호신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의 얼굴을 그린 부적이 집집마다 벽사의 상징으로 걸리게 되었던 것이다.

◇가정과 추측의 함정

이상 살펴본 이교수의 논지는 전후 사실관계가 무리없이 연결되어 사뭇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교수가 위의 모든 논지를 사실로 확정하지 못하고 가정과 추측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먼저 동북아 교역권과 남해 무역권의 공존 체제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면서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상인들의 신라 진출은 이들이 장보고 피살을 계기로 동북아교역권을 접수하면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하여 역시 확정을 유보하고 있다. 황소의 난으로 도망한 사람도 ‘20만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는 추측뿐이다. 이들 중 일부가 배를 이용해 신라로 피신했다는 논지는 ‘신라로 피신한 경우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전부이다.

논지가 이렇듯 이현령비현령식으로 애매모호한 것은 입증할 근거 사료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학은 가치가 입증된 사료를 근거로 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학문인데, 이 사료가 없으니 확정된 논지가 있을 턱이 없다. 이제 이교수의 주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자.

먼저 장보고가 피살된 후 이슬람상인들이 동북아 교역권을 장악하고 신라로 진출했다는 대목이다. 알려진대로 장보고는 해적들이 신라인을 잡아 중국에 노예로 팔아넘기는데 분개해서 이들을 퇴치하려 했고, 이를 위해 1만여 명의 군대를 확보해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 논지를 확정하려면 이슬람상인들이 장보고 피살 이후에도 횡행했을 해적을 어떻게 제압해서 신라와의 무역로를 확보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 시기가 이슬람상인들의 신라 진출을 기록한 아랍어 문헌기록 〈쿠쉬나메〉가 등장하는 시점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뿐이다. 〈쿠쉬나메〉는 과연 이슬람상인의 신라 진출을 확인해주는 자료인가? 이 시기에 이슬람상인들이 신라로 진출해 왔다면 우리측 자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왜 단 한 줄의 기록도 없을까?

◇피난민론의 허구

처용이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로 온 이슬람상인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가 중국측 사료로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시 황소의 난이 일어나 중국의 동남부 일대를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황소가 광주(廣州)를 점령했을 때 유태교·배화교·이슬람교·경교 등 이국교도로 사망한 사람이 12만 명이라는 사실뿐이다. 이교수가 제시한 이국교도들이 이에 대응하여 모색한 생존방법 세 가지는, 아무런 근거자료가 없는, 상상력의 소산이다. 특히 이슬람상인들이 피난을 위해 신라로 건너왔다는 것은 헌강왕의 개운포 출유(879)와 황소의 난(875~884)의 시기가 겹친다는데 착안한 짜맞추기에 불과하다.

이교수는 처용이 이슬람의 의학지식으로써 역병을 치료했다고도 한다. 사실일까? 그가 말하는 역병은 천연두인데, 천연두는 1796년에 영국의 외과의사 제너(E, Jenner)의 우두접종으로 비로소 예방의 길이 열렸음은 의학사에서 공인하는 사실이다. 이슬람에서 의학이 발달했음은 알려져 있지만, 천연두를 치료하거나 예방했다는 주장은 근거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처용의 천연두 처방전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천연두를 치료한 이슬람의사 처용의 얼굴 그림도 있을 수 없다. 문신(門神) 처용을 설명하기 위해 견강부회한 것이다.

이렇듯 이교수는 ‘피난민론’을 펼치면서 가설과 추측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가 입증사료로 제시하는 〈쿠쉬나메〉의 사료로서의 타당성은 아직까지 검증된 바 없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것은 신라시대사 사료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슬람세계의 서사시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을 달리해 검토할 것이다.

이교수 발제의 결론은 이러하다. 

▲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처용의 등장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일부 설화적 요소만으로는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렵다. 300여편의 처용관련 논문으로 충분하다.”

처용관련 학계를 〈쿠쉬나메〉를 발굴함으로써 일거에 평정했다는 말로 들린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아라비아인 처용에게 모스크가 아닌 불교사원 망해사를 지어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처럼 ‘피난민론’은 선행연구 이용범, 정수일의 ‘이슬람상인론’에 더하여 처용이 황소의 난 피난민이라는 실체를 보이려 했지만, 논거 사료에 대한 검증이 결여된데다 연구방법에 오류가 있어 학문적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피난민론’은 이교수 자신의 말 그대로 “구체적인 사료가 확인될 때까지는 가설로만 존재할 것이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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