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김성도와 신리초등학교

중리마을 김성도씨, 불편한 몸으로 농사지으며 살다가
대현면 상계마을의 훈장 딸 김임출씨 신부로 맞게돼
지혜로운 아내 덕분에 3남1녀 낳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1962년 1700평 규모의 부지 기증, 신리초등학교 건설
회야댐에 마을 잠기면서 1996년 23회 졸업생으로 폐교

울주군 청량면에 있는 회야댐 일대는 풍광이 좋고 특히 회야 정수장에서 석계 마을에 이르는 길은 높낮이가 적당해 마라톤을 즐기는 울산시민들이 많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들 중 90년대 까지만 해도 댐 바로 옆에 신리초등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더욱이 당시 신리초등학교가 지금은 회야댐 건설로 물에 잠긴 중리 마을에서 불구의 몸으로 평생 농사를 지었던 한 농부가 부지를 기증함으로써 건립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 60년대 초 신리초등학교가 건립될 때 학교 부지를 선뜻 내어 놓았던 김성도씨의 장남 건치씨가 지금은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옛 신리초등학교 터를 돌아보고 있다.

해방을 전후해 울산에는 학교 건립이야 말로 이 민족을 깨우쳐 일본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 사재를 털어 사숙을 세운 사람들이 많다.

조선조 말 고종 때 궁내부 주사를 지냈던 김원집과 동구의 성세빈, 이종산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김원집은 일제강점기 서당밖에 없었던 시절 신학문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재를 털어 두서면 구량리에 보신학원을 설립했다. 두서에 공립학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10여 년 간 운영되었던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신학문으로 볼 수 있는 국어·산수·역사·지리를 가르쳐 농촌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성세빈이 1925년 동구 일산진에 보성학원을 세운 것은 어린이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다. 성씨는 학교 설립뿐만 아니라 직접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보성학교는 한때 학생수가 800여명이나 되었지만 일제가 교사와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펼칠 것을 두려워 해 1929년 강제로 폐교 조치했다.

이종산은 동구 지역 교육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던 인물이었다. 해방 후 동구에서 어로사업으로 돈을 벌었던 그는 1947년 사재를 털어 울기등대 송림에 수산중학교를 설립함으로 동구에서 중등교육을 수용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들은 당시 우리사회의 지도자였거나 선각자들이었다. 그러나 김성도은 촌부로 태어나 불구의 몸으로 평생 일해 모은 돈으로 구입한 땅을 학교 건립에 내어 놓았다는 것이 이들과 다르다.

김씨는 1916년 청량면 신리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그가 살았던 지역이 수몰되어 옛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김씨가 태어날 때만 해도 신리에는 중리·신전·신리·양천 등 4개 마을이 있었는데 김씨는 이중 중리 월천 마을에서 출생했다.

5형제 중 4번째였던 김씨는 가세가 빈곤해 유년시절에는 공부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더욱이 어머니가 그의 나이 9살 때 돌아가는 바람에 어릴 때부터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새 어머니는 나중에 울산 MBC 사장이 되는 정택락씨의 4촌 누나였다.

형제들이 성장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모두 일본으로 들어갈 때도 김씨는 몸이 불편해 혼자 새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이 때문에 어릴 때는 혼자 온산에 있었던 정씨 집에서 소를 먹이는 등 농사일을 거들면서 어렵게 살았다.

김씨는 가난 속에서도 농번기에는 이웃 일을 돕는 등 열심히 일했다. 한마디로 그는 어린시절 내내 별을 보고 나가 별을 보고 들어오는 생활이었다. 이렇게 일밖에 몰랐던 그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 것은 결혼을 하면서다.

신부 김임출씨는 신리에서 멀지 않은 대현면 상계 마을 처녀였다. 장인은 훈장 출신이었고 신부의 오빠들은 모두 글공부를 많이 해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있었다.

고향에서 평생 농사만 지었던 김씨가 건강한 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일제가 농촌 처녀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결혼 당시 김씨는 27살이었고 신부는 7살이 적은 20살이었다. 이 무렵 일제는 대동아 전쟁을 일으켜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은 최전선으로 데려 갔고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들은 강제로 위안부로 삼았다.

이러다보니 과년한 딸을 둔 집안에서는 딸이 일제에 잡혀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혼사를 서둘렀다. 실제로 일제 말기가 되면 우리나라 농촌 청년들 대부분이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신랑감을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김씨가 결혼 후 형편이 나아진 것은 부인 김씨의 영명한 판단 때문이었다. 신부는 상계동에서 시집을 왔기 때문에 택호가 ‘상계댁’이어야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웅국댁’으로 불렀는데 이것은 신부의 오빠가 택호를 따로 지어주었기 때문이다. ‘웅국’은 아들을 많이 낳아 잘 키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신부는 결혼 후 3남 1녀를 낳아 이들을 모두 잘 키웠다. 이중 장남 건치(74)씨는 초대 울산시의원을 지낸 후 현재 새마을금고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신부는 결혼 후 지금까지 논농사에 매달려온 신랑과는 달리 고소득을 얻을 수 있는 밭농사에 주력했다. 그리고 밭에서 얻은 고추와 마늘 등을 가까운 덕하장과 심지어 남창장까지 가져다 팔았다.

김씨가 이처럼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의 제일 큰 걱정이 자녀들의 교육이었다. 당시 신리 마을 어린이들은 학업을 위해 매일 아침 마을에서 5~6km나 떨어진 곳에 있었던 청량초등학교까지 가야했다. 그러나 학교가 멀다보니 등교를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여름날 폭우나 홍수가 지면 회야강이 범람해 결석하는 날이 많았다.

따라서 이 지역 주민들의 소망이 마을 인근에 자녀들이 다닐 수 있는 초등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1962년 울산이 시로 승격하면서 군청과 교육청에서 마을 인근에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문제는 학교 부지였다. 군청과 교육청은 많은 돈이 필요한 학교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아 골몰하고 있었다. 이때 김씨가 이런 소문을 듣고 중리 산에 있었던 자신의 땅 5666㎡(1714평)를 기증했다.

이 땅은 그동안 김씨 부부가 열심히 일해 산 땅이었다. 지금가치로 따지면 김씨 부부가 희사한 땅이 큰 재산은 아니었지만 당시만 해도 농민들에게 땅 한 평은 피 한 방울이었다. 더욱이 그때만 해도 아직 우리사회에 기부문화라는 것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김씨의 이런 행동은 칭찬을 받고도 남을 일이었다.

부지가 확보되자 학교는 곧 세워졌고 교사들을 위한 사택까지 건립되었다. 주민들이 마을에서 학교까지 가는 연결도로도 조성해 1963년 9월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더욱이 1980년에는 청량 출신으로 재일 교포였던 양철석씨가 철석교를 세워주는 바람에 마을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신리에서 신전을 잇는 이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만 해도 신리 마을 사람들은 면 소재지가 있었던 덕하나 인근 웅촌 마을로 가려면 회야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런 어려움은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아침마다 회야강을 건너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처럼 지역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철석교는 이 마을에 회야댐이 들어서면서 물속에 잠겼다. 대신 지금은 옛날 다리가 있었던 인근에 철석씨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신리초등학교는 개교 후 20여 년 동안 많은 학생들을 졸업시켰다. 이 학교를 거쳐 간 교장들만 해도 초창기 이원기 선생이 분교장으로 온 후 김응규·윤기록·이해룡·박근철 등 4명이나 된다. 이 학교가 문을 닫은 것은 90년대 들어 신리 마을 일대가 회야댐에 잠기면서다. 마지막 졸업식은 1996년 2월 있었는데 이때 23회 졸업생들이 학교를 떠났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후 학교는 폐교가 되어 돌보는 이가 없었고 김씨가 기증했던 학교부지도 울산시교육청 소유가 되었다. 학교 건물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회야댐을 찾는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나 세월과 함께 훼손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신 옛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고 운동장에는 당시 이 운동장에서 놀았던 학생들 키만큼이나 자란 잡초가 무성하다.

신리 마을 학생들이 부지런히 드나들었던 대문도 사라져 옛 대문 자리에는 입산을 금지하는 철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나마 철문이 새로 생긴 것은 김씨가 돌아간 후 자식들이 김씨 부부의 무덤을 이곳에 썼기 때문이다.

다리는 물에 잠겼지만 철석교를 건립했던 양철석씨의 공적비는 옛 신리초등학교 위쪽에 세워져 있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옛 교정을 둘러보면 김씨의 공적비와 이곳에 옛날 신리초등학교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라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잡습니다=지난주에 연재 되었던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이종하와 종하체육관’ 중 이종하옹의 양아들 이름이 일부 ‘하우’로 표기된 것은 ‘화우’의 잘못이기에 이를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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