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환의 述而不作(술이부작)-(17) 여묘와 호랑이

조선시대 효자의 행적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부모님이 드시고 싶어하는 귀한 음식은 천지신명이 도와주어 구하고, 병이 들면 대변을 맛보면서 병세를 헤아리다가, 위독해지면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드려 소생케 하고, 돌아가시면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묘소를 지키는 일이 그것이다.

지식인들의 <문집>에는 저자의 일대기에 해당하는 ‘행장’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는 거의 예외없이 이런 효행들이 실려있다. 선비의 일생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다름없었다.

여막을 지어 묘소를 지키는 것으로
식량부족·추위·맹수의 침범 등 때문에
건장한 청년이라도 죽는 사람 많아
우리 역사엔 정몽주가 처음으로 시작

조선 후기부터 여묘 관련 이적 등장
호랑이가 지켜주고 산불 절로 꺼지는 등
드라마틱한 효과 위해 부풀려져 기록
읍지 편찬자에 돈 주고 효행 조작하기도

◇ 여묘,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효행

이 효행 중 묘소를 지키는 일은 여막을 짓는다 해서 여묘(廬墓)라고도 하고, 묘소에서 부모님 시중을 든다 해서 시묘(侍墓)라고도 한다. 여묘는 중국 한(漢)·진(晋)대에 행해졌다는데, 신주(神主) 제도가 확립되기 전에 시신이 묻혀 있는 곳에 망자의 혼이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행위라 한다. 그래서인지 여묘는 여러 경서에도 실려있지 않고, 주자도 그의 <가례>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제도화한 예법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묘를 행한 사람은 포은 정몽주이다. <고려사> 정몽주 열전에는,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을 거행했는데, 그만 홀로 여묘와 함께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해서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했다. 유교식 삼년상을 치르면서 여묘를 행했다는 뜻이다.

여묘는 묘소가 있는 깊은 산 속에 홀로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많은 고난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산 아래까지 내려가야 식량과 식수를 구할 수 있고, 겨울에는 엉성하게 얽은 여막에서 매서운 추위를 막을 길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호랑이 등 맹수의 침범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삼년상 기간에는 거친 밥과 물만 먹는 것이 예법이었다. 임금도 국상을 당하면 오랫동안 고기 반찬(肉膳)을 먹지 않다가 왕실 어른과 대신들이 여러 번 간곡하게 권하면 마지못해 응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이렇듯 뜻하지 않게 여막에서 삼년 동안이나 거친 음식으로 연명하다 보면 건강을 잃기 마련이었다.

특히 여묘하면서 삼년상을 치르고 나면 상주가 건장한 청년이라도 죽는 자가 많았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삼년상 후유증으로 죽은 사람들 이야기가 실려있다. 선조조에 세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홍섬과 광해군조의 진사 유극신이 이들이다. 필시 장기간 여묘로 인해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그러기에 중종조에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은 “우리 집안은 거상(擧喪) 잘하는 효자를 원치 않는다” 했다. 여기의 거상에는 모름지기 여묘가 포함되었을 터이다.

이처럼 여묘는 혹시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혹독한 효행이었다. 자식의 목숨과 맞바꾸는 효행을 바라는 부모가 있을까? 모든 부모의 마음은 정광필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여묘에 나타나는 이적들

여묘에는 상식으로는 믿을 수 없는 이적(異蹟)들이 늘 따라다닌다. 전국적으로 수집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터이지만, 여기서는 울산지역에 전해오는 몇 이야기를 살피고 그 의미를 천착해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 ‘효자’ 항에 여말선초에 신계은이 전후 6년을, 정종문이 3년을, 정상인이 3년을 여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책 울산군, ‘효자’ 항에는 세종조에 송도가 불교식 예법을 따르지 않고 6년을 여묘하여 정려되었다 했다. 6년 여묘는 부모가 연달아 사망하여 3년 여묘가 배로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 기록에는 여묘와 관련된 이적은 전혀 실려있지 않다. 여묘 이적은 조선후기의 읍지에 많이 나타나게 된다. 이제 종래의 여묘 사실만으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하여 보다 드라마틱한 장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울산의 효자 김여택과 관련한 이야기가 그 하나이다. <학성지>(1749) 인물, ‘효자’ 항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여택은 고령인인데, 울산부 서쪽 웅촌으로 이거해 왔다. 부친의 상을 당해 여묘를 했는데, 기르던 개가 목에 서신을 달아주면 집과 여막을 오가면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여막에는 샘이 없어 도랑물을 길어다 마셨는데, 어느 날 이 개가 땅을 파니 홀연히 물이 솟아올랐고, 삼년상을 마치고 여막을 철거하니 솟기를 그쳤다. 사람들은 하늘이 효성에 감동해서 도와주었다 했다.… 이 일이 알려져 영조 13년(1737)에 그를 호조좌랑으로 증직했다.”

그런데 이 이적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 크게 부풀려지게 된다. 1902년에 편찬된 <울산읍지>에는, 여묘하는 김여택에게 호랑이가 샘물을 찾아주고, 큰 쥐가 곡식을 날라주는가 하면, 산불이 묘소로 번져오다가 저절로 꺼졌다 했다. 샘물을 찾아준 호랑이가 사냥꾼의 함정에 빠졌는데,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 호소하여 사냥꾼들에게 부탁해서 구해냈다고도 했다. 개가 호랑이로 바뀐 것은 차치하더라도 열거한 이야기들이 신뢰하기에는 도무지 현실성이 없다.

울산지방의 여묘에 얽힌 호랑이 이야기는 열녀의 정절에도 딸려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언양현, ‘열녀’ 항에 조선 태종조에 언양현 유혜지의 처 정씨가 남편이 죽은 후 3년을 여묘하여 정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간단한 이 기록도 훗날에는 크게 부풀려지게 된다.

◇ 돈을 주고 효행을 조작하기도

정씨가 남편의 묘를 여묘하는데, 호랑이가 밤마다 나타나 지켜주었다. 이 호랑이가 어느날 사냥꾼의 함정에 빠져 정씨의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 호소하니 사냥꾼에게 사정을 말하고 구해냈다. 정씨가 남편을 따라 죽자 호랑이도 스스로 따라 죽었다. 오늘에도 울주군 상북면 능산리에 이 호랑이의 무덤이 있는데, ‘靈虎之墓(영호지묘)’라는 비석도 그 옆에 서 있다.

조선후기에는 이처럼 효행과 열행에 얽힌 이적들이 기록에 많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효자와 열녀가 살려주어 보은했다는 이야기는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지역 여러 곳에서 유사한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으니, 소설적 상상력이 빈곤했던 옛 사람들이 이들 이야기를 패러디한 것이다.

읍지의 효자, 효녀, 효부, 열녀 항목은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은 인물에 한정하여 싣게 되어있었다.

효자의 경우 <학성지>(1749)에는 송도·김여택·서필형·박시만·배두수 등 5인이 실려있는데, 후 3인은 정려를 받지 못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실린 것은 <학성지>가 관찬이 아닌 사찬읍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899년 <울산읍지>에는 효자가 31인으로, 1935년 <울산읍지>에는 140인으로 늘어났다. 갑자기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조선왕조가 말기에 들어서면서 나름대로 엄격했던 정려정책이 허구화 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정책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1933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려있다. “대구 사람 김용제씨가 울산에 와서 <울산읍지> 발간을 준비하던 바… 지난 20일 울산군 향교 직원 조성덕씨 외 32인이 총독부에 진정했는데, 범서면 서진규·김기찬 양씨에게 7백원에 권리를 팔았고, 양반의 ○○비로 50자 이내 2원, 100자 ○원 50전씩 받는다는 것 등이라 한다.”

이처럼 울산의 읍지를 대구 사람이 사사로이 편찬하고 있었다. 그는 읍지 편찬의 권리를 팔거나, 읍지에 실어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기도 했다. 140명이 실린 이 읍지의 ‘효행’ 항에 ‘단지주혈(斷指注血)’과 ‘삼년여묘(三年廬墓)’는 식상할 정도로 많고, 앞의 호랑이 이야기도 곳곳에 실려있다. 효자는 울산의 유력가문 인물이 다 등장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교 직원 등의 진정으로 보아 편찬자에게 금품을 제공하면서 효행을 과장하거나 조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1935년판 <울산읍지>이다.

오늘날 울산에서 효사관학교 운영, <효행록> 발간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효행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만 비현실적 이적을, 조작한 효행을 사실로 가르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글= 송수환 울산대 연구교수

그림= 최종국 한국미술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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