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반구대 앞에서

▲ 반구대 암각화 앞에 선 만화가 박재동 화백의 상상력이 그림으로 탄생했다. 반구대 암각화는 수많은 상상을 자아내는 스토리의 보고다. 박 화백은 구광렬 교수의 소설 <반구대>를 토대로 암각화를 그리고 있는 선사인들의 모습

반구대라는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에 젖어든다. 7000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는 곳, 그 신비감으로….

또한 그 곳이 알고 보니 내 고향 울산에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마치 우리 집 장롱 안쪽에 숨겨 놓은 보물처럼 뿌듯하기도 하고 은근히 “반구대? 그거 우리 고향에 있잖아”하며 자랑하기도 한다.

우리 겨레가 갖고 있는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 그 이름 반구대를 불러 보면 저마다 각각의 생각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럴 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한다. 왜냐면 나는 암벽에다 그린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그림을 그린 바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렸을까? 새기는 돌은 무엇이었을까? 돌 끝은 어느정도 뾰쪽하며 혹시 부러지지 않을까? 바위는 얼마나 단단 할까? 고래 그림 같은 것은 끝이 좀 둥근 걸로 때린 것 같은데 어느 정도였을까? 예리하게 새겨진 그림은 청동기였을까? 새기는 돌은 한손으로 새겼을까 아니면 왼손에 새김돌을 쥐고 오른손으로 쳤을까? 두손으로 했다면 치는 망치는 돌이었을까? 아님 나무였을까? 한손으로 쳤다면 그냥 맨돌로 쳤을까, 아님 돌에다 천이나 가죽을 싸고 쳤을까?

구광렬 교수의 소설 ‘반구대’에
웹툰 그리게 된 박재동 만화가
누가, 어떻게, 어떤 장비로…
암각화가 새겨질 당시의 상황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들
당시의 삶 그림으로 풀어내며
묘한 흥분과 기대감에 부풀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설치 될 발판대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어느 정도 높이였을까? 그리다가 내려와 물을 마시고 다시 올라 갔을 테지. 언제 그렸을까? 짐승을 하나 잡고 난 뒤 그걸 요즘 기념사진 찍듯이 그린게 아닐까? 교육용일까? 아니면 이런 것을 잡게 해 달라고 빌기 위한 것일까? 그림은 혼자 새겼을까? 아니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큰 제사를 지낸 다음 새겼을까? 아니면 혼자 혹은 둘이서 새기고 난 뒤에 제사를 지냈을까? 아니면 누군가가 혼자 그냥 그린 것일까?

▲ 선사인들이 암각화 속 고래를 잡는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당시 그림 그리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어땠을까? 아주 하천한 지위였을까? 아니면 그림 그리는 능력을 아주 특별하게 생각하여 노래와 춤과 더불어 신을 대리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은 사람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진 않았을까? 그래서 샤먼과 같은 지위였을까? 혹시 샤먼을 겸했던 건 아닐까? 제사와 정치가 일치됐던 시대였을까 아님 분리되었을 때였을까?

그림들을 보면 그림 솜씨도 다 다르고 기법도 다르다. 절대 한사람의 솜씨는 아니다. 이것은 그림 그리는 사람은 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여러 세대에 걸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지금 기술에서 볼 때는 매우 미숙하다. 물론 그 당시로서는 놀라운 표현이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의 그림은 지금의 눈으로 봐도 놀라운 솜씨를 보여 준다. 고래그림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생각하면 고래 그림이 후대에 그려 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런 그림들은 연습을 하고 그렸을까? 스승은 있었을까? 알타미라 동굴 벽화 같은 것도 깨어진 돌멩이 파편에 그림 연습한 흔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아님 그냥 마을에서 평소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그린 것일까? 옛날 마을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이 모심기 노래나 상여 소리 선창도 하듯이 말이다.

암각화는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라 오며가며 보는 그림이었을까, 아님 멀리 떨어져서 일부러 이것을 보기 위해 특별한 걸음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볼거리가 너무 많아 이런 바위그림은 큰 규모가 아니지만 옛날에 이런 그림을 그릴 일도 볼 일도 거의 없었을 때, 이런 그림을 한번 보는 것은 그야 말로 아이맥스 스크린이나 거대한 규모의 엑스포를 구경하는 규모가 아니었을까?

고래 그림은 고래를 한 마리 잡을 때 마다 그린 것일까? 아님 한꺼번에 그려 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교육용으로 쓴 것이 아닐까? 고래는 어떻게 잡았을까? 그 옛날에 말이다!

창은 뭘로 만들었을까? 돌이나 짐승뼈나 아니면 청동기로? 창은 뒤에 아마도 긴 밧줄을 달았을텐데 그 밧줄은 무얼로 만들었을까? 칡껍질로? 그럼 배는? 당시는 판자를 만들기는 너무나 어려웠을 때니까 통나무 배였을 텐데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큰 나무를 무얼로 잘랐을까? 무얼로 가운데를 파냈을까? 파도는 어땠으며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까?

한 마리를 잡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간이나 먹었을까? 저장은 어떻게 했을까?

그때 사슴정도나 잡았을 때에 이런 고래를 잡았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을 텐데, 그래서 저런 규모의 암각화를 그릴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울산은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가 아니었을까? 그 뒷심으로 지금의 울산의 조선업, 자동차, 기타 공업단지가 된건 아닐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중에 구광렬 교수가 이미 오랫동안 준비한 소설 <반구대>를 쓰고 내가 그걸 웹툰으로 그리게 되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부분은 이미 연구된 결과로 알게 되었지만 이제 더 많고 구체적인 상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실제로 이제 내가 진짜 그리게 되었으니까!(그러고 보면 그때 반구대 암각화 화가는 지금의 웹툰 작가였던 셈이다!)

옷은 어떻게 입었을까? 디자인 콘셉트는 어땠을까? 족장의 옷은? 머리엔 무엇을 썼을까? 당골레의 의상은?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남자의 머리는? 신발은?

마을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으며 움집의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릇은 어디에 어떻게 놓아 두었으며 무엇을 담았으며 잠자리는 어떤 모양? 화덕의 모습은? 햇볕은 어떻게 안으로 들였고 관솔불은 있었을까?

모계사회라면 결혼은 어떻게? 아이는 어떻게 키우고? 연애는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떻게? 권력 관계는 어땠으며 이웃마을과는 어떤 관계였을까?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교류했을까? 소금은 어떻게 만들고 흑요석은 얼마나 사용했을까? 고래잡는 기술은 어떻게 발견되었고 전수 되었을까? 농사가 안되고 수렵도 잘 안되었을 때 무엇을 먹었을까? 장례는 어떻게 치렀을까? 족장은 어떻게 일반인은 어떻게? 등등.

의문과 상상이 계속되고 이미 소설 원작자 구광렬 교수가 풀어 놓은 것도 많고 다른 연구자들이 풀어 놓은 것도 있지만 아직 잘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어 상상력으로 메꾸어야 할 부분도 많다.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또한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 당시의 삶을 소설가의 이야기와 함께 더하여 장면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들려 준다는 것은 묘하게 흥분되는 일이다.

▲ 박재동 만화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그래서 지금 나는 마치 시합을 앞둔 마라톤 선수나 권투 선수처럼 뜀뛰기를 하며 몸을 풀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도록 몸과 맘을 만들어 본다.

긴장되면서 묘한 기대에 차기도 한다.

박재동 만화가·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반구대포럼·울산대공공정책硏 재능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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