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2)5대 총선과 보도연맹

▲ 북구 천곡동 분통골에 있는 옛 ‘서포 어른’ 집. 6·25 무렵 좌우익 갈등 속에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서포 어른’의 집이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5대총선은 4·19 혁명 3개월 뒤 시행되었기 때문에 울산에서는 자연 보도연맹 문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6·25전후 발생한 보도연맹 관련자 학살 사건에서 울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희생자들이 많았다.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결성되었다. 단체가 결성된 것은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했거나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보도연맹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자유당 정권이 6·25가 일어나자 전쟁을 빌미로 이들을 재판도 없이 처형시켜 유족들의 분노가 컸다. 또 이승만 정권이 집권하는 동안 정부가 보도연맹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입도 열지 못하게 해 희생자 유족들은 가슴앓이를 했다.

4·19 혁명 후 민주화와 함께 언론이 자유화 되면서 보도연맹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해방후 울산지역 좌익 준동 심해
보도연맹과 관련된 희생자 많아
이 후보, 연고없던 울산서도 표몰이
故 김태호 의원 부친 ‘서포어른’도
6·25 무렵 빨치산에 억울하게 희생

해방 직후 울산에서는 800여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무현 정권 때는 과거사위원회에서 피해 보상을 위해 유족들의 신청을 받았는데 울산지역에서는 모두 155건의 피해자 신고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 희생자는 이 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대운산과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 등 많은 지역에서 이들의 처형이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무룡산 등 깊은 산골에서도 처형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방 후 울산에는 좌익의 준동이 심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이들과 연계된 사람들이 많았고 이 때문에 억울하게 타계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고 김태호 의원의 부친 김재식(金在植) 어른도 이 무렵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사건 당시 북구 천곡동에 살았던 김 어른은 마을에서 ‘서포 어른’으로 불렸다. 김 어른은 일제강점기 농소면 농정계에서 일했다. 그런데 일제 말 조선총독부는 전쟁 준비를 위해 농민들이 산의 나무를 벌목해 화목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특히 화목으로 소여물을 끓여주는 것을 금하고 생식으로 소를 키울 것을 장려했다.

따라서 김 어른은 이를 주민들에게 알리고 시행할 것을 독려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해방 후 좌익과 짜고 김 어른을 살해했다. 살해 당시 농소 마을에는 빨치산들의 준동이 심해 김 어른은 주로 면사무소에서 일하고 잠도 그곳에서 잤다.

그런데 살해를 당하는 날 천곡동 자신의 앞집에서 환갑잔치가 열려 잔치에 참석했는데 이 때 김 어른을 나쁘게 본 마을 사람이 빨치산에게 김 어른이 집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빨치산들이 그날 김 어른 집을 급습해 그를 살해했다.

김 어른은 50대 초반 영면했는데 그의 차남 태호씨가 나중에 울산출신의 4선 의원으로 내무부 장관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부친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형제들이 많았던 김 의원은 학창 시절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울산농고를 다닐 때는 집에 쌀이 없어 도시락을 싸가지 못해 학우들이 교실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 그는 학교 우물로 달려가 물만 마시면서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농소일대가 6·25 전후 빨치산들의 준동으로 해방구가 된 적이 있다. 당시 농소 지역의 빨치산 지도자는 곽모씨였다. 옛날 농소의 이화 마을 일대에는 현풍 곽씨들이 많이 살았다. 그런데 곽모씨는 이들 문중에서도 머리가 영리하고 세상사에 밝아 문중에서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곽모씨가 당시 무룡산에 준동했던 빨치산의 우두머리가 되어 곽씨들을 대거 산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들은 이화마을 위 성지골 인근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주민들을 괴롭혔고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찻길 옆 전신주의 전선을 모두 절단했다. 이 때문에 농소 일대는 일주일 동안 통신망이 모두 끊겨 외부와 연락이 되지 않아 암흑 천지가 되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울산경찰서에서 의용경찰들을 이화마을 뒷산으로 보내어 아지트를 찾아 모두 소탕하는 바람에 해결되었다.

어린 시절 5세의 나이로 김재식 어른의 장례식 때 만장을 들고 상여를 따랐던 이수원(李樹元, 72) 전 울산시보건환경연구원장은 “김 어른의 죽음으로 김 어른 집안과 그가 집에 있다는 것을 빨치산에게 밀고한 이웃과는 사건 후 오랫 동안 원수지간으로 살았지만 김 어른의 아들 태호씨가 중구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 마을 사람들과 내가 나서 ‘정치를 하려면 이웃 간 반목부터 풀어야 한다’고 권유했고 이를 양 집안에서 받아들여 겨우 화해를 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김 어른의 먼 집안으로 오랫동안 한 마을에서 살았다.

5대 총선에서 이런 울산군민들의 여론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보도연맹 문제를 선거 이슈로 부각시켰던 인물이 이수갑 후보였다. 출마 당시 진보당 중앙위원이었던 이 후보는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출마했는데 출마 당시 나이는 33세였다. 주소는 부산 범천동으로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울산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다. 이런 그가 울산에서 출마한 자체가 보도연맹 문제가 뜨거웠던 울산에 출마할 경우 당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선거전에서 울산의 보도연맹 문제를 핫이슈로 삼았는데 보도연맹 가족과 젊은 학생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아 유력한 당선 후보로 부상했다.

당시 이 후보의 찬조연사였던 이증(81)씨 역시 보도연맹 유가족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주제로 연설해 가는 곳마다 유권자들의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울산 출신으로 90년대 울산MBC 사장으로 부임했던 이증씨는 이때 서울에서 성균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특히 그가 강동에서 한 보도연맹 연설은 강동면민의 심금을 울린 명연설로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재 서울 궁정동에서 살고 있는 이증씨는 “당시 문중 형님으로 노동운동을 열심히 벌이고 있었던 이씨가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 찬조 연설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서울에서 울산까지 와 유세를 하게 되었다”면서 “당시 형님은 물론이고 나 역시 연설을 할 때 마다 많은 유권자들의 열화 같은 박수를 받았지만 형님이 울산 출신이 아니고 당시 주소를 부산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외면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씨가 얻은 표는 2500여 표로 8명의 후보 중 5위를 차지했다. 그가 인기에 비해 이처럼 득표가 낮은 것은 울산 출신이 아니고 ‘날아온 돌’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출신지역을 중히 여겼다. 따라서 이씨의 경우 우선 출신지가 울산이 아니었고 또 학교 역시 울산에서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지인들이 많지 않아 패한 것으로 분석된다.

울산에서 낙선한 후에도 이씨는 노동운동가로 각종 모임에 참석,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다. 이후 민족운동단체 연합회 회장직을 맡았던 그는 1993년 8월29일에는 서울 현저동 독립공원에서 열렸던 모임에서 친일세력 척결과 재산몰수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해방 후 좌우익 갈등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았던 ‘서포 어른’의 집은 현재 비어 있지만 아직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천곡동 분통골에 있는 이 집은 본채가 슬레이트로 아직 그대다. 본채 앞에는 사랑채가 있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서포 어른’이 돌아갔던 해에 사랑채가 무너졌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옛날 대밭이 있었던 집 뒤로는 넓게 포장된 도로가 생겼고 집터에는 당시 사건을 지켜보았을 우물과 10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가 그대로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집 인근에 김씨 문중의 전답도 있었는데 최근 후손들이 모두 정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과거의 비극을 잊었는지 이 집터를 놓고 “서포 어른의 아들이 내무부 장관까지 지냈고 그의 손자 둘이 현재 서울에서 대학 교수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손자며느리 이혜훈이 서울에서 3선의원이 된 것을 생각하면 비록 이 집에서 서포 어른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 집터가 ‘명당’”이라고 말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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