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4)열혈청년 김병룡 후보

▲ 울산여고에서 여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로즈메리. 로즈메리는 1967년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울산여고에 와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때 5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병룡씨 집에서 김홍명 당시 영어교사와 함께 자취를 했다.

5대총선의 특징은 개혁파의 대대적인 선거 출마였다. 울산만 해도 신교환, 탁장제, 이수갑, 김병룡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출마했다. 이들이 개혁을 외친 것은 개혁이야 말로 4·19혁명을 완수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각은 좋았지만 당시 우리사회는 이런 혁명적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다. 실제로 이승만의 장기집권과 독재는 우리사회에 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4·19혁명 후 한꺼번에 터진 민주화의 봇물은 오히려 민주화를 후퇴시키는 요인이 됐다. 따라서 이들이 부르짖은 개혁은 시험대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사 혁명을 불러오고 말았다.

당시 국민의식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은 이 선거에서 개혁의 기치를 앞세우고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한 신교환의 회고록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신씨의 선거를 돕기 위해 일선에서 뛰었던 신씨의 장남 기엽씨는 회고록에서 신씨를 회상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돈 많이 쓴 정해영 후보에 반감
선거후 몽둥이 들고 찾아가기도
5대 총선, 개혁파 대대적 출사표
오히려 민주화 후퇴시키는 요인
악질순사 노덕술 출마가 대표적

“4·19 직후 민주화의 봇물이 터지자 제자들의 권유로 아버님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아버님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우리사회가 아직 민주화되지 못해 있었다. 인물과 학식보다는 조직과 인맥이 우선하는 선거풍토에서 아버님은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당시 나는 아버님의 선거유세용 지프를 타고 유세장 구석구석을 돌았다. 마을 큰 정자나무 아래 모여 있던 하얀 두루마기의 촌노들을 향해 아버님은 ‘혁신만이 살길이다’고 목청을 높였지만 마을 사람들 중에는 혁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의 출마는 현실적 계산 없이 이루어진 무모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을 못살게 굴었던 악질 고등계 형사 노덕술이 울산에서 출마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무모한 민주화 바람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출마 당시 노씨는 주소가 울산군 대현면 장생포리 92번지, 나이는 60세, 경력은 총감부관방장이다. 선거 결과 1700여 표를 얻었다.

일제강점기 그의 행적을 보면 그가 울산에서 출마한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그가 8명의 후보 중 다른 4명을 제치고 4위나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가 얻은 대부분의 표는 고향 장생포에서 나왔다.

일본 이름 마쓰우라(松浦)인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울산경찰서에서 경찰에 첫발을 디딘 후 일본 경찰의 앞잡이로 애국지사들을 못살게 굴었다. 20세에 울산경찰서에 처음 들어갔던 그는 경찰 입문 전 울산보통학교를 중퇴했는데 이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노덕술이 울산경찰서에 근무한 1920년대는 울산청년회, 울산성우회, 울산혁신회가 조직되는 등 청년들의 항일운동이 울산에서 자주 일어나게 되는데 이 때 노덕술은 항일운동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못살게 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울산경찰서를 ‘순사의 소산지’라 불렀는데 그만큼 울산경찰서에서 노덕술 같은 악질 순사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얘기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이들 중 사망한 애국지사들도 있다.

이병주는 그가 쓴 <남로당>에서 노덕술에 대해 ‘일제강점기 고문왕으로 알려진 노덕술이라는 경찰관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중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살아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의 정의로 보면 노덕술은 해방 후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역사의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이 될 무렵 평양경찰서장을 지냈던 그는 이곳에서 공산세력에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맞는다. 그러나 위험한 고비를 용케 빠져나왔던 그는 남한으로 와 1946년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주선으로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이승만 세력을 숙청하고 좌익분자를 검거하는데 앞장서 반공주의자로 명성을 날린다.그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 김원봉을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취조한 것이 이 무렵인 1947년이다. 약산은 일제강점기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장을 지내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살았던 인물인데 최근 상영된 영화 ‘암살’에는 그의 활동이 잘 그려져 있다.

노덕술은 약산을 취조하면서 ‘뺄갱이 두목’이라고 욕하면서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 때 노덕술이 얼마나 그를 못살게 굴었던지 약산은 고향 밀양으로 와 마을사람들에게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이 이 땅에 살다가는 노덕술이 같은 인간에게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한탄했다. 이후 그는 1948년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 협상에 참여한 후 북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노덕술은 선거에서 자신이 해방 후 혼란기를 맞아 좌익세력을 척결했던 반공주의자라면서 득표 활동을 벌였지만 고향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외면했다.

민족에게 이런 씻지 못할 죄를 지었던 노덕술은 그럼에도 제 수명을 다하고 죽었다. 선거 이후에도 서울에서 가장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기생과 함께 살다가 1968년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눈을 감았다.

노덕술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은 지금도 장생포에 있다. 장생포 해안에 있는 경로당에서는 5대 총선에서 노덕술을 도왔던 문중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 대부분은 “당시 우리 문중 사람들은 노덕술이 서울에서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만 들었지 그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면서 “그는 선거 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장생포에 온 적이 없다”고 말했다.

열혈청년 김병룡 후보도 5대 총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출마 당시 김 후보는 29세로 주소는 울산군 울산읍 옥교동 94로 돼 있었다. 한국사회당 중앙위원 출신인 그는 무직으로 부산고 4년을 중퇴했다.

선거에 출마하기 전 일본으로 밀항, 와세다 대학에서 불어 공부를 했다. 금권 선거를 싫어했던 그는 자신의 선거에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민주당의 김택천 후보와 경쟁을 벌이면서 많은 돈을 쓴 정해영 후보가 옳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는 선거가 끝난 후 몽둥이를 들고 정 후보 선거사무실이 있던 학성여관으로 달려가 정 후보가 부정선거를 했다면서 달려들기도 했다.

당시 정 후보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했던 최종두 시인은 “김병룡 후보는 패기 있는 청년으로 클린 선거에 앞장섰지만 유세 때는 고함만 질렀을 뿐 유권자들이 호응할 수 있는 공약사업을 제시하지 않아 울산군민들이 외면했다”고 회상한다. 선거 결과 그는 650표 밖에 얻지 못했다.

김 후보는 선거 후 계비고개 근처에 큰 집을 지어 놓고 세를 줬다. 이 때 이 집에서 김홍명 전 울산대 교수와 로즈메리가 자취를 했다.

당시 김 전 교수는 울산여고 교사로 있었고 로즈메리는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미국에서 울산에 와 1967년부터 다음해까지 울산여고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그들이 계비고개 근처에서 자취를 했던 것은 울산여고가 이곳에서 가까운 함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울산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로즈메리의 통역을 맡았던 김 전 교수는 “당시 김 후보의 부친이 울산 인근에 전답이 많아 가을이 되면 소작인들이 김 후보 집으로 쌀가마니를 많이 갖고 왔다”면서 “김 후보 집에는 우물이 마당에 있어 편리했지만 화장실이 대문 밖에 있어 로즈메리와 내가 많은 불편을 겪었다”고 회상했다.

2014년 50여년 만에 딸과 함께 울산을 다시 찾은 로즈메리는 자신이 자취했던 집을 보고 싶어 했지만 당시 집은 번영로 확장으로 뜯겨나가 찾을 수 없었다.

1970년대 수원으로 이사를 간 김 후보는 그곳에 머물면서 일본사를 연구한 후 ‘일본의 진수’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지만 이후 소식은 알 수가 없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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