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생사(生死)와 불교사상

▲ 통도사 입구 부도원(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곳). 불교에서는 생과 사를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고 본다.

생사(生死)문제에 대한 고민은 종교는 물론 모든 철학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틀어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의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음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생사(生死) 해결에 대한 문제가 없다면 종교도 없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마음에는 생사가 없다(心無生死)고 한다. 마음이란 나온 곳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없는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 즉 ‘나’라는 것은 업(業)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는 물질과 같은 것으로 생사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알게 되면 ‘도통(道通)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흔히 생사를 영원한 생명의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파도에 비유하고 있다.

파도가 바닷물의 일부이듯 둘은 연결돼 있으며 한 몸이나 마찬가지로 본다.

그래서 생사일여(生死一如) 또는 생사불이(生死不二)라 하며 생사가 하나가 되니 오고감에 자유롭고 삶과 죽음에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불교에서는 원래 생과 사의 실체가 없다고 규정하고
‘나’라는 허망한 의식에 집착함으로써 고통받는다고 봐
생사를 바로보고 깨달으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설파
생사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설로,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영혼은 다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영원히 산다는 믿음이다. 현세는 다음 세상을 준비하며 삶을 살아가는 단계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영혼이란 존재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여기고 현생에서 모든 것을 다 누리려고 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지금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시공간에서 연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상태에서는 시공간에서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절되어 있으면서 항상하고 항상하면서 단절되어 있는 이 것을 무상(無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불멸이라는 영혼이 연속되어 다음 세상에 태어난다는 견해를 상견(常見)이라 하고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단절된다는 견해는 단견(斷見)이라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붓다는 우리가 이해하는 두 견해를 모두 부정하고 중도(中道)를 말하고 있다.

즉 인연처에 따라 단견으로 보이기도 하고 상견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순간도 같지가 않은 변화무쌍한 흐름이 인연에 따라 단견도 아니고 상견도 아니면서 동시에 단견이 아닌 것도 아니고 상견도 아닌 것이 아닌 중도의 삶을 사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 현재를 사는 것이다.

즉 현재 단절된 바로 이 순간을, 이 무시간성을 영원히 사는 삶이라 한다. 비트겐슈타인(1889~51년,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수, 철학자)은 “영원히 무한한 시간의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이다.

우리가 탄생에서 늙어 죽는다는 인식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신체는 음식을 섭취함으로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불멸의 존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것으로 명색(名色)이 있을 때 지각하게 된다. 명색을 지각하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이름과 형태를 지각하는 것으로, 외부에 그러한 이름과 형태를 가진 대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러한 이름과 형태로 지각하는 내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의식은 무엇인가? 의식은 인식의 대상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으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즉 명색이 있을 때만 의식도 있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의식이 바로 우리 신체 속에 존재하는 불멸의 영혼이나 정신적 실체로 여기고 이 실체가 외부의 실체인 명색을 지닌 사물을 인식한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무지의 상태(無明, 삶을 생과 사로 이분화시키는 힘)에서 주객을 분별하는 삶(行)을 통해 형성된 의식(識)이 명색을 대상으로 지각함으로써 객관세계에서 주관으로서의 자아가 태어나서 죽는다고 믿게 되는 착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본래 모든 것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듯이 생사(生死)가 없는데 무지한 상태에서 ‘나’라는 허망한 의식에 집착하게 됨으로써 우리에게는 생사가 고통으로 다가오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붓다가 생사윤회(生死輪廻)라고 부른 것은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자아에 집착하여 살아가게 되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삶을 가리키고 있다.

이 것은 생사가 무명에서 연기한 것으로 ‘무아(無我)’를 깨달음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꿈은 허상이지만 꿈꾸는 사람에게는 엄연히 존재하듯이 생사윤회는 착각이고 망상이지만 착각을 지니고 망상을 일으킨 사람에게는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생사윤회도 계속되는 것이다. 생사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생사가 착각임을 모르는 것이고 동시에 연기와 무아의 깨달음을 모르는 상태로 생사의 괴로움은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꿈만 꿈이 아니라 현실도 꿈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현실과 꿈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환상이나 집착에 쌓여 끝없는 번민의 바다를 방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을 간밤의 꿈으로 보아버린 사람이 깨우친 자로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붓다는 생사가 있다는 견해와 생사가 없다는 견해를 모두 배척하고 중도(中道)의 무명에서 생사의 괴로움이 연기하는 과정(苦集)과 무명을 멸하여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滅度)을 가르쳤다.

세상에 모든 생명체는 생사를 벗어날 순 없지만 생사를 바로 보고 불교의 깨달음을 완성한다면 죽음은 고요한 빈자리인 입적, 열반, 적멸, 해탈 등으로 해석되며 생사는 없는 것이다.

금생에서 어떤 종교를 가지든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고민해보는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다음 게송(偈頌)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태어남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남이고 죽음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사라짐이다.”

부운자체철저공(浮雲自體澈底空) 환신생멸역여연(幻身生滅亦如然)

“구름의 바탕을 꿰뚫어 보면 실체가 없듯이 실체 없는 몸뚱이 나고 죽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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