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66)허장렬 선술집

▲ 백암 정창화씨는 공화당 창당을 위해 60년대 초 당시 성남동 동아약국 사거리에 있었던 ‘허장렬 선술집’에서 젊은이들을 자주 만났다. 이 집은 당시만 해도 일본식 가옥이었으나 지금은 양옥으로 변해 커피점과 의상실이 들어서 있다.

공화당 창당을 앞두고 백암 정창화씨가 도심에서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곳은 ‘허장렬 선술집’이었다. ‘허장렬 선술집’은 정식 상호가 아니고 술집 주인이 허장렬씨다 보니 붙여진 이름이다. 이 술집은 중구 성남동 동아약국 사거리에 있었다. 백암은 당시 ‘허장렬 선술집’에 대해 자서전 <격랑의 시대를 살다>에서 다음과 같이 그려 놓고 있다.

“공화당 사무국 일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허장렬 선술집’에 대한 추억이다. 나는 당 조직을 관리하면서 당세 확장을 위해 매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는데 이 술집은 내가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곳이다. 막걸리와 정종을 팔았고 안주로 내 놓는 생선구이가 일품이었다. 꽁치와 정어리, 고등어를 연탄불로 구워내던 그곳은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안주만 장만해 두었는데 안주가 동이 나면 문을 닫았다.

궁사 허장렬씨가 운영한 선술집
막걸리·정종·생선구이 등 인기
울산서 이름난 애주가들 몰리며
세상돌아가는 이치로 얘기꽃도
옥교동은 밤만되면 취객들 북적

술집·여관 급증 꼬집는 기사도 싱싱한 생선구이와 함께 마시던 막걸리 맛에 반한 탓도 있지만 그곳에서는 젊은이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어 좋았다. 따라서 나는 해거름이 되면 언제나 그곳에 갔다. 주인 허장렬씨는 활을 잘 쏘는 궁사였다. 목적은 당세 확장이었지만 그곳에서 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 나타나는 인사들도 내가 정치 얘기를 하지 않아도 왜 이 집을 자주 드나드는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서로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정치 얘기는 하지 않고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했다. 물론 좌중의 술값은 내 몫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울산에서 술깨나 마신다는 사람들은 모두 모였다.

부산일보 기자로 주당이었던 이철응씨가 이 술집의 단골손님이었고 언론인 이용호씨도 허장렬씨 장남 정석씨의 친구로 이곳을 자주 찾았다. 단체 손님으로는 울산제일중학교 교사들이 많이 왔다. 수업이 끝나고 배가 출출해지면 제일중학교 교사들은 이곳까지 걸어와 술을 마시곤 했다.

‘허장렬 선술집’과 쌍벽을 이루었던 술집이 ‘부흥집’이었다. ‘부흥집’은 성남동 성남파출소 앞 골목에 있었는데 주인 노씨가 사냥을 하러 자주다녀 사람들은 ‘노포수 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대 울산시의원을 지냈던 설성대씨와 박정태 당시 한국일보 주재기자가 이 술집의 단골이었는데 언론인 김정길씨도 때때로 이들과 합세했다. 이철응씨 역시 ‘허장렬 선술집’에서 1차를 한 후 이곳을 찾기도 했다. 특히 설씨와 박씨는 이곳에서 복국을 안주삼아 밤새도록 술을 마셔 아침이 되면 술집 앞에 빈 소주병이 널려 있었다.

실제로 울산이 공업도시로 발돋움을 할 때인 60년대 초까지 만해도 울산에는 애주가들이 찾을 실비 술집이 많지 않았다.

도심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영업을 했던 상록관과 명월당 요정이 있어 울산 유지들이 드나들었지만 이곳은 술값이 비싸 일반인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울산에 술집이 번창한 시기는 60년대 초 공업도시가 되면서다. 이 무렵 전국 근로자들이 모여들면서 술집도 성업을 맞았다.

옥교동 거리에 밤이면 빨간불이 켜지고 짙은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근로자들을 유혹했던 때가 이 무렵이다. 이곳에는 아직도 당시 술집들 중 일부가 혐오시설로 남아 있다.

이처럼 흥청되다 보니 전국 아가씨들이 울산으로 모여들어 타 지역 사람들은 “우리나라 미녀들이 울산에 모두 모인다”는 말을 했고 옥교동 거리는 밤만 되면 취객들의 노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아가씨들이 몰리다보니 의상실과 산부인과들도 재미를 보았다. 돈이 흥청거리다 보니 깡패들도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선거 때가 되면 돈을 받고 특정 후보를 도와 불법 선거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술집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히 여관과 다방도 늘어났다.

커피에 계란을 타주는 모닝커피가 유행한 것이 이 때부터다. 도심에서 사람들이 만나면 “차나 한잔 하자”는 말이 유행처럼 되었다.

다방에는 얼굴 마담과 레지도 4~5명이나 되어 레지들이 매상을 올리기 위해 손님들과 함께 홍차에 위스키를 타 마셨다.

이런 경기에 편승해 돈을 많이 벌었던 술집이 홍콩 비어홀이었다. 60년대 초만 해도 맥주 값이 비싸 일반 근로자들은 막걸리와 소주만 마셨다. 그런데 공장에서 돈을 많이 버는 임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상대로 맥주를 파는 홍콩 비어홀이 중앙호텔 앞에 문을 열었다.

특히 홍콩 비어홀은 화려한 네온사인 시설을 해 울산의 변두리 사람들이 술은 마시지 않으면서도 야경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장월선이 운영했던 미광술집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옥교동 미나리카바레 인근에 있었던 이 술집은 대중 술집이었지만 인기가 대단했다. 중앙시장 앞에 있었던 동경비어홀도 이 무렵 문을 열었다. 이 술집은 나중에 동경음식백화점으로 변신, 식당으로 호황을 누렸다. 젊은 시절 JC활동을 열심히 했고 나중에 심완구 국회의원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이 상점 주인 김영균(74)씨는 지금은 밀양 표충사 아래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부작용도 많았다. 경향신문은 1966년 울산이 공업도시로 지정된 후 많이 발전하고 있지만 당초 건설 계획의 절반도 완성하지 못한 채 술집과 여관만 늘어나 부작용이 크다고 기술해 놓고 있다.

‘울산은 공업도시로 지정될 때만 해도 술집과 식당이 50여개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500여개가 넘어 골목마다 카바레요 술집이다. 유흥세 징수도 11배로 늘어나 연간 115만원이나 걷힌다. 여관도 15개였던 것이 지금은 2개의 호텔을 비롯해 60여개나 되지만 손님들이 많아 모두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술집이 늘어나 경기가 좋아지고 있지만 서민들은 주택 가격의 상승과 물가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중에도 울산의 술집은 70년대에 들어서면 소위 말하는 ‘방석집’이 늘어나 성황을 맞게 된다.

울산에서 고급 양주인 베리나인 골드를 맨 처음 팔았던 술집이 아카시아다. 울산전신전화국 맞은편에 있었던 이 술집은 연주자가 직접 악기를 들고 방에 들어와 연주까지 해 인기가 있었다. 특히 이 술집에는 음대를 졸업했던 연주자가 연주해 술 보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찾는 애주가들이 많았다.

이 연주자는 당시 울산MBC에 근무했던 대학 동창이 손님들을 많이 끌어오는 바람에 큰돈을 벌기도 했다.

코리아나호텔 뒤에 있었던 호랑나비도 아가씨들의 서비스가 좋아 애주가들이 많이 찾았다. 술집 위층에 당구장을 차려 놓아 손님들이 당구를 치기도 했던 이 술집은 모 중진 언론인과 당시 권력의 상징이었던 모 기관의 소장이 종업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허장렬 선술집’은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허씨가 술장사를 할 때만 해도 이 집은 앞에 있는 동아약국 건물과 함께 일본식이었는데 지금은 양옥으로 커피점과 의상실이 들어서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허씨는 이곳에서 술을 팔기 전 담배 가게를 차려 놓고 담배를 팔았다. 허씨가 이곳에 술집을 차린 것은 맞은편 동아약국 자리가 경남여객 울산영업소가 되어 사람들이 붐볐기 때문이다. 허씨 역시 한 때는 대한금속여객 울산영업소 소장으로 일해 초기에는 자동차 관련 사람들이 이 술집을 많이 찾았다. 이후 허씨는 이 집을 장시우씨에게 세 주었는데 장씨는 이 건물에 울산초밥집을 차려 재미를 보았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허씨는 장사를 하면서도 활을 손에 놓지 않고 매일 활을 쏘았다. 당시 울산에는 만하정과 원악정 등 두개의 궁도장이 있었는데 허씨는 현재 울산MBC 자리에 있었던 만하정에서 활을 쏘았다. 당시 그와 함께 궁도를 즐겼던 사람들로는 박지중과 이병우씨가 있다. 일제강점기 부산중학교를 졸업, 부산에서 사업을 했던 박씨는 울산의 최고 멋쟁이로 통했고 이씨는 당시 울산경찰서 정보과장직에 있었다. 덕양에너젠 이덕우 회장도 당시 이들과 궁도를 즐겼다.

허씨는 이후 아들을 따라 부산에서 살다가 영면했고 이 집은 이후 박병민(78)씨가 사 들여 지금은 커피점과 의상실이 되어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바로잡습니다..
지난 11월 7일자 이 지면에 실렸던 ‘6대 총선과 정창화’ 기사 중 강동의 윤동훈씨는 윤현걸씨 부친이 아니고 강동 면장을 지냈던 윤승은씨가 조선일보를 거쳐 울산 MBC 보도부장을 지냈던 윤현걸씨 부친임으로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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