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토정비결(土亭秘訣)

▲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고 한해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풍습이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 오늘 날에도 한해 운세를 알아 보고 대비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찾아보고 있다.

명운(命運)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은 물론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토정비결’(土亭秘訣)이라는 책이 운세를 보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정월마다 ‘토정비결’을 보고 한해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는 풍습이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

물론 오늘 날에도 한해 운세를 알아 보고 대비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을 찾아보고 있다.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지은이가 이지함이 아니라 그의 이름만 빌려 썼다는 설도 있다(假託).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선중기 명종때의 학자이며 예지력이 뛰어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으로 알려져 있다.

한해 길흉화복 예측하는 도참서로 조선 중기 이지함이 썼다고 전해져
이지함은 양반이자 성리학자였지만 각종 당쟁사로 친구·장인이 죽자
관직 포기하고 미치광이처럼 세상 유람하며 가난한 방외인의 삶 택해
56세때 당대 학자 남명의 추천으로 벼슬 시작, 청빈함으로 존경 받아

이지함은 북창 정렴,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인(奇人)중 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토정비결은 정감록이나 격암유록 등과는 차이가 있지만 일종의 도참서(圖讖書, 미래의 길흉을 예언하거나 그런 내용을 적은 책) 이다.

이지함(李之菡)(1517~1578)은 조선 중종12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토정유고(土亭遺稿, 내용은 시 2편, 논설 3편, 상소문 2편이 실려있다)’의 저자이다.

이지함은 서울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냈다 해 토정(흙으로 만든 정자)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 후손으로 현령을 지낸 이치(李穉)의 아들이다. 북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기도 하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맏형인 성암 이지번(李之蕃)에게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 등에 능통했다.

토정이 살았던 당시의 조선은 당쟁사에서 많은 선비들이 수난을 겪어야 했던 시대이다.(갑자사화, 을사사화, 청홍도 사건 등)

토정의 삶에 변화가 있었던 계기는 1548년 그의 친한 벗 안명세(승정원 사관)가 사초(史草, 조선시대 사관들이 그때그때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둔 史記의 草稿. 實錄의 원고)에 을사사화(乙巳士禍, 조선 명종 대 문정왕후 일가의 권력 다툼으로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를 비판한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건과 토정의 장인인 이정랑이 역모사건의 괴수로 연루되어 처형되고 처남들도 처형을 당하였던 청홍도(淸洪道) 사건(명종실록)이었다.

양반의 후손으로 앞날이 창창한 성리학자였지만 이러한 비극적 사건들을 보면서 심적 변화를 일으키면서 관직을 포기하고 미치광이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기인(奇人)으로 방외인(方外人)의 삶을 택했다. ‘재물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재앙이 따르는 법’이라며 스스로 청빈함을 신조로 삼았다.

토정은 수십년간 쓰고 다녔던 갓이 망가져 버리자 집에 있던 구멍난 낡은 밥솥으로 갓을 대신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휴대용 밥솥으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1570년대에 토정이 유람 중 금강산에 이르러 날이 저물어 바위 위의 한 암자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전국 명산의 산신령들이 나라에 사변이 생길 것을 걱정해 모임을 가졌는데 삼각산 신령, 지리산 신령, 금강산 신령 등이 대화를 갖고 헤어지는 것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나 임진왜란의 발발(勃發)을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백성의 삶과 국가경제에 관심과 고민이 깊었던 토정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생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 백성들과 동고동락했다. 토정은 그들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도록 돕기 위해 직접 고기를 잡아 팔고, 야채를 재배해 곡식과 바꾸는 등 상거래를 활성화해 부(富)를 꾀하려고 했다.

또한 백성들이 은광을 개발하고 장사를 해 전국 해변에서 소금을 만들어 곡식과 바꾸게 하고 인삼과 도자기를 생산해 외국과 교역하게 해 백성들의 생업을 부흥시키고 부국의 기초를 다지자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각종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도가의 신체단련법이면서 치료법이기도 하였던 풍욕(風浴)과 단식요법 등을 전파하고 풍수와 주역을 연구해 백성들의 불안감을 완화하고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는데 노력했다.

한편 토정은 화담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율곡 이이와 남명 조식 선생 등과의 교류도 깊었다.

선조6년 능력과 지식을 가진 재야의 선비를 기용하는 정책을 이용해 남명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토정을 천거, 56세가 되던 비교적 늦은 나이에(1573년) 포천현감으로 벼슬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후 1578년에는 아산현감으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평생 전국을 떠돌며 백성들의 생활을 지켜봐왔던 토정은 포천현감이 되던 첫날부터 진수성찬은 치우고 잡곡밥과 우거짓국 한 그릇만 올리라고 명하였으며 밥상도 필요없고 삿갓을 넣은 상자를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포천지방의 관리들이 부임인사를 왔을 때에는 시래기죽을 내놓았는데 당시의 벼슬아치들에게는 고역이었을 것이다.

토정이 포천현감으로 재임한지 1년정도 지날 무렵 조정에 올린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구실로 사직했다. 토정이 떠나던 날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만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 아산현감 재임시에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부랑인의 구호와 자활사업에 힘썼다. 아산에 부임한지 3개월정도 지나 운명을 달리하였을 때 고을의 백성들이 거리로 나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들을 보면 토정이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토정비결의 철학은 70%이상이 행운의 괘로서 앞일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 보다는 삶에 찌들린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데 중점을 두었던 그의 사상과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그 책에서는 요행이나 횡재를 말하지 않고 불리할 때에는 준비를 하며 시기를 기다리고 유리할 때는 계절이 지나가는 비유로 이치를 일깨워 겸허하게 살며 대비하라고 충고하며 인내와 슬기를 가르치고 동시에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의 정신적 위안이나 구원처가 되기도 했다.

조선의 다른 도참서처럼 국가나 왕조의 운명을 유추하고 새시대의 도래를 예견하는 것과는 달리 토정비결은 개인의 미래에 대한 운세를 해설하고 처세훈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것의 내용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진 김진명리학회장 울산대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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