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동면사무소에서 생고기로 유명한 봉계를 이어주는 군도 31호선을 따라가면 치술령 북쪽 들판에 떡 하니 자리잡은 마을이 월평(月坪)마을이다.
 못안과 봉계 사이에 있는 월평마을은 상월평과 하월평 두 마을이 남북으로 나눠져 있다. 이곳 월평은 경주 외남면시절 먹을 만드는 먹점이 있어 묵장(墨匠)으로 불렸을 정도였으나 먹점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다만 20세기 초에만 해도 이곳은 쇠불이 터가 곳곳에 남았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곳 들판이 산에 둘러싸여 흡사 한문의 "월(月)"자 처럼 생겼다 해 마을 이름도 월평이 됐다. 1906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 외남에서 울산에 속하게 됐다.
 치술령과 먹장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들판은 두동면 가운데 가장 넓다. 그래서 상·하월평 마을에는 200집 가까이가 들판 한 쪽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다. 치술령 골짜기의 백양곡 물줄기는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내달린 뒤 동해의 푸른물과 섞인다. 월평이 바로 형산강의 발원지이다.
 월평마을은 90년전에 교회가 세워질 정도였으나 바로 윗마을로 불고기 촌이 형성된 봉계와는 달리 새집이 드물다. 굳이 자식들이 들어와 살 것이 아니면 집을 새로 지을 필요가 없기에 그렇다.
 순박한 마을 월평에도 몇해 전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닥쳐 마을간 불화도 없지 않았다. 바로 마을 북쪽 입구에 "화약저장고" 설치 여부를 두고 찬반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많이 봉합됐다.
 용궁전씨(龍宮全氏)들이 이곳 월평에 가장 먼저 와 터를 잡았다. 처음 월평에 정착한 어른은 도시조 전섭 할아버지의 43세손으로 시조인 문정공 전방숙(全邦淑)의 28세손인 통덕랑(通德郞) 종구(從耉) 할아버지다. 통덕랑 할아버지는 고향인 경북 예천 용궁에서 이곳으로 왔다. 지금으로부터 약 360여년 전의 일이다.
 입향조의 11세손인 전병화(全炳和·82)씨는 "입향조께서 어떤 연유로 고향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며 "다만 혼자 오신 것으로 후손들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마을 왼쪽 낮게 북으로 뻗어내린 산이 용궁전씨들의 선산으로 이곳에 입향조 종구 할아버지 등 선대들의 묘소가 있다.
 입향조가 처음 자리한 곳은 월평마을 가운데 상월평이었다. 그 뒤 입향조의 외아들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오주(五柱) 할아버지의 두 아들 근택(近宅) 근환(近環) 가운데 근환 할아버지가 하월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병화씨는 "마을의 위치가 산골이어서 관직에 나선 선대가 없을 정도로 그저 농사짓는 평범한 생활로 지내온 지가 입향조 이후 13대째다"며 "마을사람들의 순박함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말했다.
 종손으로 용궁전씨 월평리종친회장인 종윤(鍾允·53)씨는 문중들이 울산과 경주, 대구, 서울 등 외지로 많이 나가 이제는 상·하월평에 20여집만이 전씨 문패를 달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전씨가 가장 많다"고 설명했다.
 병화씨는 "월평마을의 토박이 성씨로는 전씨, 단양우씨, 월성이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지만 지금은 박씨, 공씨, 조씨, 김씨, 고씨 등 다양한 성씨들이 모여 살고 있다"고 말했다.
 종윤씨는 "멀리들 나가 있지만 음력 10월10일 입향조 등을 모시는 묘제 때에는 잊지 않고 문중들이 마을을 찾는다"고 덧붙였다.
 후손들 가운데 공학박사로 진주 경상대 정보통신공학과 전성근 교수가 이곳 월평리종친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입향조의 12대손인 대우중공업 전재국 부장과 부산시 기장군의 예일산교회 전재전 목사는 형제간으로 상월평을 고향으로 두고 있다.
 이밖에 월평리 용궁전씨 출신으로 종식씨가 대구에서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재용씨는 두동면사무소에서 근무하다 퇴직했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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