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신선이 사는 곳, 봉래산
부산 영도 주봉 이루는 봉래산
높진 않지만 코스 다양해 추천
목장원서 정상 오르며 본 부산
바다너머 펼쳐진 산들 한눈에
제주도민 영도 이주 역사 담긴
산제당·아씨당 설화찾는 재미도

▲ 부산 영도에 있는 봉래산은 영도의 주봉을 이루는 산으로 산 전체가 원추형을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부산은 항구도시 특유의 아름다움과 낭만이 가득했다.

1.
오랜만에 섬 산행을 했다. 섬이라고는 하지만 도심 가운데에 있다. 부산 영도에 있는 봉래산이다. 영도에는 봉래산(蓬萊山, 395m), 중리산(150m), 태종산(太宗山, 250m)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섬의 절반 이상은 북서부의 봉래산과 해안 시가지가 차지하고 있다. 산지는 남서 사면이 급경사이고 북동 사면은 완만한 편이다.

영도는 예부터 말 사육장으로 유명해 목도(牧島)라 부르기도 했다. 또 이곳에서 사육된 명마가 빨리 달려 그림자조차 볼 수 없다 해 절영도(絶影島)라고 불렸다. 영도는 해운대구 좌동의 구석기 유적과 더불어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인 동삼동, 아치섬[朝島], 영선동 등의 패총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들 유적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해 석기 등이 많이 출토됐는데, 그 시기는 대략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부산 지역은 삼국시대에 일찍이 신라의 지배를 받았는데, 영도 지역도 신라의 지배 아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도 태종대의 지명 기원이 신라왕인 태종무열왕과 관련이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영도는 임진왜란 이후 무인도로 바뀐 적이 있다. 이는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이 두려워 주민들이 섬을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 데다가, 왜관의 개설과 더불어 왜관과 가까워 사민책(徙民策)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업 등의 이유로 소수의 주민이 거주했지만, 전체가 100호 미만이었다고 한다. 1601년부터 이곳에 있던 임시 왜관은 1609년 두모포왜관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대일교역의 창구였다. 조선 후기에는 이곳에 수군진영인 절영도첨사영이 1881년에 설치돼 갑오경장 뒤인 1895년까지 15년 동안 존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부산부에 편입됐다.

▲ 봉래산은 높지는 않지만 여느 산보다 풍경이 좋고 코스가 다양해 산행하기에 좋다.
▲ 봉래산은 높지는 않지만 여느 산보다 풍경이 좋고 코스가 다양해 산행하기에 좋다.

2.
봉래산은 본래 중국의 전설상의 산이다.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따르면, 영주산·방장산과 더불어 삼신산으로 부르는데, 그곳에 선인이 살며 불사(不死)의 영약이 거기에 있다고 한다. 봉래산의 남쪽 해안, 산둥반도에 있던 제나라에는 그 삼신산을 신앙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제나라의 사상가 추연(鄒衍)의 음양오행설과 결부돼 신선 사상의 바탕을 이루게 됐다. 진시황제가 서불로 해금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게 한 곳이 바로 삼신산이다. 이러한 신선 사상을 동반한 봉래산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도 전래해, 민간신앙과 무속(巫俗) 등에 깊이 침투해 있다.

부산 영도에 있는 봉래산(蓬萊山, 394.6m)은 영도의 주봉을 이루는 산으로 산 전체가 원추형을 나타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산의 형태가 고깔을 닮아서 고갈산 또는 고깔산이락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한자명 표기는 목이 마른 산을 뜻하는 고갈산(枯渴山)이다. 이는 땅의 기를 없애고자 일제가 인위적으로 붙인 지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도 산 모양을 따서 붙은 지명으로 알아 고갈산으로 불렸다가, 부정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봉래산으로 고쳐 불렀다. 봉래산은 3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조봉, 그다음 봉우리는 자봉, 그 아래의 것을 손봉으로 부르고 있다.

봉래산에는 산제당과 아씨당이 있다. 조선 시대에 영도에는 나라에서 경영하는 국마장이 있었다. 그런데 영도에서 말을 실어 갈 때 서쪽으로 끌고 가기만 하면 말이 병들어 죽어 버리는 일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한 선녀가 노복 두 사람을 데리고 절영도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나오는 것을 본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산포 첨사 정발 장군(1553~159)의 꿈에 한 선녀가 나타났다. 그 선녀는 자신은 천상에서 쫓겨나 탐라국 여왕이 됐다가 최영 장군이 탐라를 점령할 때 그의 첩이 됐는데, 최영 장군이 탐라를 떠난 뒤 신돈의 모함으로 절영도에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고 절영도에 왔지만 끝내 최영을 만나지 못하고 한 많은 귀신이 됐으니 자신을 위해 사당을 짓고 혼을 위로해 달라고 했다. 정발은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조정에 아뢰었고, 조정에서 동래 부사 송상현에게 명해 산제당과 아씨당을 짓고 해마다 봄·가을에 제를 지내게 했다. 그 이후부터는 군마가 폐사하는 일이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제주도민들이 영도로 이주했던 역사적 사실을 내포하고 있어 주목되는 설화이다.
 

3.

코스는 ‘목장원-돌탑삼거리-복천사-산제당-봉래체육공원·생태자연공원-장사바위-미륵사약수터-손봉-자봉-봉래산-영봉약수터-돌탑삼거리-목장원’으로 잡았다. 복천사를 지나고 산제당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실수로 본의 아니게 코스를 변경해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서 헬기장에 도착했다. 헬기장에서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 그 길에서 바라보는 부산은 항구도시 특유의 아름다움과 낭만이 가득했다. 부산은 해발 500~800m짜리 산들(금정산, 백양산, 장산, 황령산, 승학산, 엄광산 등)과 바다(해운대, 광안리, 송정, 다대포, 이기대와 동백섬, 송도, 청사포, 태종대와 중리해변 등),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인 낙동강과 삼각주의 충적평야인 김해평야 등이 아름다움을 더하는 곳이다.

하산은 자봉, 손봉을 거쳐서 임도로 하산한 후 출발지인 목장원으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 손봉에서 임도까지는 거의 90도에 가까울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봉래산은 높지는 않다. 그렇지만 여느 산보다 풍경이 좋고 코스가 다양해 산행하기에 좋다. 봉래산과 연관돼 걷기 좋은 길들도 많다. 산의 멋스러움만큼 사람들이 덜 찾는 것 같아서 아쉽다.

하산길에 문득 당나라 때의 서정시인 이상은의 ‘무제(無題)’라는 한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만나기도 어려운데, 헤어지기도 어렵구나 / 봄바람에 힘없이 온갖 꽃이 다 시드네 / 봄 누에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실 뽑기를 다하고 / 촛불은 재가 돼서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네 / 새벽 거울 마주 보고 흰 머리털 시름겨워하고 / 밤 깊어 시 읊조리다 달빛 찬 걸 깨닫네 / 봉래산은 여기서 가는 길이 많지 않으니 / 파랑새야 자주 가서 알아보고 오렴’

▲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 어리버리산악회 회장
▲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 어리버리산악회 회장

송철호 인문고전평론가 어리버리산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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