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도시를 꼽으라면 나는 그 첫 손가락에 이스파한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페르세폴리스가 페르시아 문명의 뿌리라면 이스파한은 단연코 이란 문명의 꽃이다. 이스파한은 고대 사산조 페르시아 시대로부터 이란의 중심에 해당하는 중요한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이 제국의 수도로서 새롭게 건설된 것은 16세기 사파비 시대라고 할 수 있다.사파비 왕조의 압바스 1세는 1597년 이스파한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을 세계의 중심답게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건설하려 했다. 많은 건축가와
오아시스 도시 야즈드를 나서면 황량한 사막이 펼쳐진다. 생명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황야가 멀리 지평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도시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은 남쪽으로 15km 거리에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언덕뿐이다. 낮은 언덕이지만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장소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침묵의 탑’이라고 부르는 조장터가 자리한다. 왼쪽 높은 것이 남성용, 오른쪽이 여성용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어로 다흐메(Dakhmeh)라고 부르는 이 조장터는 조로아스터교 장례문화의 유산이다. 시신을 새 먹이로 주는 장례방식은 우리에게 너
중세도시 야즈드(Yazd)의 골목길 안에는 신비스런 주택들이 숨겨져 있다. 높고 두터운 황토 담장에 달려있는 작은 문들이 주택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대문을 열지 않는 한 그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황토 빛 담장 뒤에 숨겨진 이란인들의 살림살이, 그들은 이 척박한 사막에서 어떤 삶의 환경을 만들었을까.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골목 풍경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녹색 식물과 물이 가득한 수조, 바로 정원이다. 서구 정원 양식의 모태가 되었다는 ‘페르시아식 정원’, 예기치 못한 극적 반전을 경험한다. ‘페
이란 중부에는 ‘미친 사막’이라는 뜻의 루트(Lut) 사막이 있다. 2012년에 세상에서 가장 더운 곳으로 선정될 만큼 폭염이 이글거리고 모래바람이 거센 황무지 사막이다. 토양은 소금기가 많고, 강수량보다 증발량이 많으니, 식물은커녕 박테리아조차 살 수 없는 땅으로 비유된다. 야즈드(Yazd)는 이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다. 이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 샘이 있었던 모양이다.사막이라는 극단적인 환경에서 오아시스 지역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공간적 경계를 이룬다. 쫓기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피난과 은신의 장소가 된다. 7세기 무렵
20년 전에도 이란을 여행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아야했다. 미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험악한 나라로 인식된다. 고집이 세고, 과격하고, 배타적이며, 엄격한 이슬람 율법 등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잘못된 선입관은 대부분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건축적 유산에 관한한 이란만큼 매력적인 곳은 없다. 50여개 나라를 돌아다닌 후에도 이란의 건축유산은 여전히 첫 손가락에 꼽힌다.이란을 페르시아와 연결 지을 정도면 세계사적 안목이 제법 깊은 사람이다. 페르시아. 정
카파도키아는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의 독특한 지질을 갖는 지역이다. 구릉 형태의 산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의 평원으로 이루어진다. 바위 언덕은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의 형태여서 목재로 집을 짓기도 어렵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숨을 곳이 마땅치 않다. 로마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박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바위굴을 파고 숨어사는 방법이었을 것이다.심지어 그들은 개미굴처럼 땅을 파고들어가 지하도시 데린쿠유를 만들었다, 규모가 큰 것은 깊이 85m, 지하 20층의 규모로서 5000명
터키 내륙으로 향하는 길은 광활한 초원의 길이다. 풍광이 지루할 듯도 하련만 결코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거대한 공간감 때문일까.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실크로드 장면이 데자뷔가 되어 되살아난다. 지평선은 실크로드의 천산산맥처럼 멀리 보이는 설산까지 전개되어 장엄한 파노라마의 경관을 펼쳐준다. 초록빛으로 덮인 초원은 생명과 생산의 땅이다. 일부러 심지 않아도 싱싱한 풀이 자라나 비옥한 목축의 땅이 된다.풍광만이 유사한 것은 아니다. 초원지대는 기원전 2세기 이래 길이 되었다. 유목 민족들은 가축을 따라 초원을 이동했고, 중동과 중국인
에게해 연안을 향해 굽이굽이 산길을 넘어 에페수스(Ephesus)로 향한다. 로마도시의 유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터키 땅에서 에게해에 면한 도시들이 대개 비슷한 역사적 과정을 가지고 있듯이 이곳 또한 그리스, 로마의 문명에서 시작된 도시다. 기원전 8세기 이전부터 이미 에게해를 건너온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폴리스)를 건설했고, 기원전 1세기에는 그 지배권이 로마로 넘어갔으며, 4세기부터는 동로마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터키의 에게해 연안에서 그리스와 로마시대의 유적, 또는 비잔틴 유적을 만난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은 아
석회질의 온천이 절벽을 타고 흘러내려 목화처럼 하얗게 만들었다고 붙여진 이름. 관광객들에게는 파묵칼레로 알려진 곳이다. 눈 덮인 것처럼 하얗게 물든 언덕과 김이 피어오르는 옥빛 온천수가 경이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장시간 버스여행에 지친 여행객들에게 따뜻한 온천욕의 기대는 가히 관광지로서 명성을 얻을 만하다. 건축물에만 관심이 있는 내게는 잠시 쉬었다 지나가는 휴게소나 다름이 없다.온천장으로 가는 길은 약한 빗발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사이로 이천년의 세월을 버틴 유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성벽과 성문, 분명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터키의 맨얼굴을 보려면 커피향이 진한 바자르(시장)로 가야 한다. 그곳은 세상의 온갖 인종이 뒤섞이고, 온갖 물건이 몰려들어, 온갖 돈과 언어가 교환되는 곳이다. 가히 실크로드의 기착지라 할 수 있다. 오래된 가게를 잘 뒤지면 ‘마술램프’나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찾아 낼 것 같은 동화적 호기심에 빠지게 마련이다. 한 시간만 거닐어도 ‘니 하오’에서부터 ‘곤니찌와’, 그리고 ‘안녕하세요’를 지치도록 들을 만큼 과도한 관심과 형제애를 느끼게 된다.인구의 다수가 무슬림이지만 부르카를 강요할 정도의 종교적 엄격함도 없다. 워낙 다양한
오스만 투르크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1453년은 터키의 문명과 역사가 바뀌는 획기적 전환점이다. 이는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멸망을 의미하는 동시에 종교적, 문명적 대전환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는 동로마제국에서 오스만제국으로 전환되었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문명에서 이슬람문명으로, 지리적으로는 유럽권에서 아시아권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도시 이름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뀌게 된다.오스만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은 술레이마니에 대제(재위 1520~1566)다. 서구사회에서 조차 ‘위대한 군주(Sulyemanye mag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꼽으라면 누구든 그 첫손가락에 성 소피아 사원을 꼽는데 주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스탄불 도시경관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은 바로 소피아 사원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건축적 걸작을 이스탄불의 랜드마크라는 차원에서 평가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다. 그것은 터키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적 문화유산이며, 비잔틴 문명을 대표하는 역사유산인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초월하는 종교적 유산이며, 나아가 인류 역사의 빛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성 소피아 사원(Hagia Sophia)은 ‘성스러운 지혜’라
발칸 반도 동쪽 끝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만나는 아나톨리아 반도, 바로 오늘날의 터키 땅이다. 그 해협 양쪽에 걸쳐 이스탄불(Istanbul)이 있다. 다리를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 지구가 갈려있으니 이를 동서양의 경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양 대륙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대립해 온 역사도 이러한 지정학적 인식을 굳혀 주었다. 과연 터키는 유럽일까, 아시아일까?문명사의 관점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땅은 고정되어 있으나 문명은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다. 실상 10세
강렬하게 쏟아지는 태양이 짙은 녹음으로 풍경화를 그려내는 8월의 바르샤바. 결코 우중충하거나 허름하지 않은 고건축들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거리에 붉은 꽃들이 정갈하게 가로풍경을 수놓는다. 프라하만큼 고색창연하지도 않고, 부다페스트만큼 우람하지도 않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가로풍경은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빠지지 않는다. 순백색의 드레스와 화사한 꽃무늬 조끼, 화관을 쓴 처녀들의 흥겨운 군무를 연상케 한다. 쇼팽의 폴로네이즈(polonaise)가 어울리는 도시풍경이다.그 화사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난과 질곡의 역사를 생각하며 구도
유럽의 지도를 펼치면 그 중앙부를 차지하는 나라 폴란드. 200m이상의 언덕도 보기 힘든 유럽의 광활한 평원지대에 자리한다. 강과 호수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평원이 짙은 유화로 그린 풍경화가 되어 차창을 따라온다. 9세기경 그 평원에 정착했던 슬라브족은 ‘평원에서 사는 사람들(polian)’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에서 유래한 폴란드(poland)라는 국가를 세웠다.광활하고 기름진 토질과 풍부한 물이 풍요로운 농경사회의 기반을 이루었지만, 강대국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막아주거나 기댈 곳이 없이 사통팔달의 지형이니
시민 공동체 삶·역사 담은 구시가지황금기인 카렐 4세때부터 본격 개발다른 시대유형들 조화로 장관 이뤄80m의 높은 첨탑 자랑하는 틴성당프라하의 연륜과 기품 그대로 담아세계적 관광지로 손꼽히는 카렐교예술·문화적 품격과 부가가치 집약프라하성이 지배자의 공간이라면 구시가지는 시민의 공간이다. 프라하성이 차별적인 권위를 과시하는 상징물이라면 구시가지는 시민의 공동
1천년의 역사로 도시 이룬 프라하 성카렐 4세 세운 성 비투스 성당이 중심거대한 첨탑·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마황제 위용과 프라하 황금기 상징프라하 시내 경관 수놓은 빨간 지붕들체코인들 자유 향한 열망 보여주는듯보아족의 땅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보헤미아(Boiohaemum), 그들을 일컫는 보헤미안(Bohemian)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수
통치자와 시민들 연결한 세체니다리페스트지역의 본격적인 개발 신호탄헝가리 민족의 주체성 되찾는 계기도건국 1000주년 기념해 세운 영웅광장초대 국왕에 바친 성 이슈트반 대성당중세·근대양식 집합체 국회의사당 등기마민족의 기원·역사 고스란히 담아부다페스트는 부다 지역과 페스트 지역의 합성이다. 도나우 강변을 중심으로 평야 지형이 페스트 지역이고, 부다 지역은 반
윤심덕(1897~1926)이 부른 ‘사의 찬미’는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Losif Ivanovici 1845~1902)의 ‘도나우강의 잔물결(Donau Wellen Walzer)’을 번안한 노래다. 이 노래는 도나우강의 잔물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허무주의적 가사로 시작한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아름다운 물결
전원적인 농촌 소도시 잘츠부르크의중세 첨단양식 호헨잘츠부르크성거대 첨탑으로 장식된 화려한 대성당교구의 수장이자 영주였던 대주교의교회적 도시국가 위용 그대로 간직화려한 분수와 조각품으로 장식된미라벨 정원과 별궁까지 돌아보면종교개혁의 시발점 된 시대상 그려져비엔나에서 잘츠부르크로 향하는 길, 기차 차창 밖으로 알프스의 산악풍경이 동영상으로 펼쳐진다. 기차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