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부부로 연재한 이종웅과 김희자씨 부부 얘기는 뒷얘기도 많다. 이씨는 1960~70년대 울산 중심가인 성남동에서 천지상회를 운영했던 이규봉씨의 아들로 많은 상속을 받았지만 한 평생 적선만 하다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신문에 기사가 난 보름 후 타계했다. 아쉬움은 이들 부부가 전국 방송을 탈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씨의 삶이 기사화 된 것은 지난해 4
제108회에 첫 보도가 된 ‘김호경(金昊經)과 백마부대’는 연속 3회 연재되었다. 고인이 된 김호경 중위가 시집을 남겨 두어 처음에는 월남에서 용감하게 싸웠던 그의 무용담을 싣고 두 번째로 시의 내용을 독자들에게 알릴 계획이었다.그런데 두 번째 기사가 나간 뒤 서울에 사는 여동생 양자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양자씨는 “오빠의 월남전 활동이 최근 안정효씨가 쓴
2012년 12월26일부터 시작된 ‘파란만장 그 시절’이 2년 6개월 만에 종언을 고한다. ‘김종신 서장 피살사건’을 시작으로 해방 전후 울산에서 일어났던 각종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다루었던 이 연재는 지금까지 150여명의 울산 인물들을 등장시켰다.이들 중에는 박병호, 김기오, 김활천, 이규명, 이후락 등 울산을 빛낸 인물들도 있었지만 노덕술, 천경록,
신불산 배내골 옥봉을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본보 6월25일자 1면 참고)이 일고 있다. 산 높이가 해발 682m이기 때문에 흔히들 ‘682고지’로 부르는 옥봉은 6·25를 전후해 동부경남에서 빨치산이 가장 많이 준동했고 그만큼 국군과 빨치산 간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는 인민군 학교까지 있어 서부경남 일대에서 패망한 빨치산과
흔히들 울산은 전국에서도 시인이 많은 도시지만 이에 상응하는 훌륭한 시가 없다고 말들을 한다. 서전(曙田) 이상숙 선생이 지난 13일 향년 88세로 경기도 남양주에서 타계했다. 해방 후 그가 울산의 척박한 문단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얘기는 지난 해 ‘이상숙과 명다방’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적이 있다.해방 후 그가 울산에서 문단활동을 할 때만 해도 대부분의
사회 혼란 속에서 청년들 이끌지역 원로 조직인 국민회 활동충혼탑 국민회 명단에 처음 올라해방 후에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한독당 선전부장 지내며 사회운동 울산지방경찰청은 지난 5일 중구 성안동 청사 정문 옆에서 해방 후 울산에서 순직한 경찰관 110명의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울산에서 경찰이 많이 순직한 것은 6·25 전후다. 6·25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바늘구멍 뚫고 부산제2상고 입학‘고을의 경사’였던 은행 취직 성공이후락 비서실장 추천으로 서울 진출상업은행 상무-제일은행 전무 거쳐1972년 조흥은행장까지 승승장 울산시 중구 성남동 ‘문화의거리’에는 오랫동안 비어 있는 고층 건물이 있다. ‘크레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10여 년 전 영화관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건물주와 땅주인이 서로
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성장했지만국가 장학생 뽑혀 체육·학업 병행대학 졸업 후 울산서 교편 잡으며학생 씨름단·육상 꿈나무 등 발굴체육학부 교수·국가대표 코치활동도제자들이 결성한 ‘고운회’ 모임 활발 울산체육인들은 울산체육회 70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고운(孤雲) 김기봉(金基鳳)씨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운은 육상분야에서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에
해상왕 장보고가 우리들 가까이 온 것은 최인호 소설가가 쓴 의 영향이 크다. 최 작가는 2003년 장보고 일대기를 이라는 소설로 발표해 역사의 인물 장보고를 우리들 가까이 옮겨놓았다. 이 소설은 2004년 11월부터 6개월 동안 KBS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그런데 최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 그에게 장보고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장보고가 활
고아들 가르친 ‘새길원’·탄광촌 자녀 교육 맡은 ‘지성학원’ 거쳐1972년 약사동서 청각장애아동 위한 ‘메아리학교’ 특수교육 시작무료 인공와우 수술·청각재활 프로그램 통해 소리 다시 찾아주고육상·수영·스키 등 장애인 스포츠팀 육성 한국대표로 올림픽 출전도 지난 주 우리들은 가난한 자와 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봉사자 한 명을 떠나보냈다. 고(故) 박무덕
울산학사 건립이 불투명하다는 소식이다. 울산시교육청은 그동안 울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안정적 면학 분위기 조성과 학부모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울산학사 건립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최근 울산시교육청은 이 사업이 예산이 많이 소요되고 사업 성격상 교육청보다는 지자체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어 놓아 사실상 울산학사 건
일제강점기 울산 방어진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방어진과 가까웠던 일산진에서는 항일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박학규와 성세빈씨는 민족주의자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일산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둘 중 성씨가 비교적 많이 알려진데 반해 박씨가 덜 알려진 것은 박씨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좌익활동을 하다가 돌아가셨고 이후 자녀들이 아버
1960년대 중반 울산 동구에서 발생한 ‘오좌불 간첩사건’은 당시 국내 최대 간첩사건으로 일산진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밀양박씨 문중을 몰락시켰고 어린 시절부터 보성학교에 함께 다니면서 ‘적호소년회’ 회원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박두복과 천경록의 우정을 파괴했지만 지금은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박두복과 천경록은 1914년 일산진과 화정리에서 각각
어제(19일) 북구 천곡동 순금산 자락에서는비가 오는 가운데정임석 열사의 추모식이 있었다.정 열사는 4·19혁명 때 울산 출신으로순국한 유일한 학생이었다.울산은 3·15 부정선거에 대한시민들의 저항이 컸지만정작 4·19혁명 때는10일을 전후해 울산 곳곳에서20~30명씩 게릴라 시위만 있었을 뿐이다. 4·19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 열사는 꽃다운 21살의 나이
울산 사람들은봄이면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작괘천을 찾는다.작괘천에는 역사적 유물이 많다.작천정 정자가 있나 하면임진왜란 때 활약했던의병장들의 이름을 새겨놓은‘선무원종공신마애석각’도 있다.또 옛날에는 석수사와 수석암 등사찰도 많았지만이들 고찰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불타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이곳을 찾는 사람들이간과하기 쉬운 유적 중 하나가‘인내천’ 바위다.이
지난달 27일 대법원이 울산인물에 대한 중대한 판결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벌였고 해방후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학암(鶴巖) 이관술(李觀述) 유가족들에게 그동안 입은 피해를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학암 선생이 돌아간지 60여년이 훨씬 넘었고 가족들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낸지 2년이 더 된 시점에 나온 판결이다. 학암의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 울산 출신으로 추전 김홍조 만큼 우뚝 선 인물도 없다. 당시 그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언론인과 경제인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경주 최부자에 맞먹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교를 세우고 인재 양성을 위해 일본에 유학생을 보내는 등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3·1운동 후에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왕성한 활동
양산시 원동 출생으로개천예술제에서 장원하며 시인 등단부산·울산 등지서 DJ로 활동노래‘영일만 친구’의 모델이 되기도천부적 재능 가진 전천후 예술가로말도 잘하고 글도 잘 쓴 방송인1997년 쉰을 채우지 못하고 타계원동역서 그의 시비 만날 수 있고이상구씨의 식당 ‘차사발’에 가면홍씨가 수집한 LP도 들을 수 있어지난주 토요일부터 양산시 원동에서는 매화축제가 한
추전, 1900년대 중반 개화기때 목재업 사업으로 큰 돈 벌어반구동 생가 인근에 별장 짓고 울산 찾을때마다 손님 맞아사찰이 된 학성선원은 1970년대 들어 신정동으로 옮겨와학성공원내 새로지은 별장 영호정 아래에 가족 묘터 조성 1950~60년대 울산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학성공원 아래 있었던 학성선원을 본 사람들이 많다.이 선원은 초기 추전(秋田) 김홍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울산은 최전선에서 멀어 당장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울산도 전쟁의 폐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특히 울산에 제23육군병원이 들어서면서 많은 부상자들이 울산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울산시민들은 전쟁의 생생한 상흔을 보고 겪어야 했다.울산에 육군병원이 처음 건립된 곳은 울산농고였다. 이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