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太和江百里:8. 대곡천에 핀 불교문화(상)

▲ ‘영남 5경 속의 장천사’라는 제목의 왼쪽 그림은 현재까지 장천사를 그린 유일한 그림으로 주목받고 있다. 장천사가 영남루와 쌍벽루 등과 동급으로 영남 5경에 들어간 사실이 흥미롭다. 이 그림은 지난 2016년 어느 경매에 출품돼 알려지게 되었다. 아래 사진의 원 안이 장천사가 있었던 자리다. 위 그림과 아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사찰 뒤 산의 모습과 앞쪽의 벼랑(지금의 대곡댐 소수력발전소), 그리고 사찰건물 앞쪽의 시내 등이 거의 일치한다.

신라시대 대곡천 일원
절경마다 사찰 들어서
구곡문화의 초석 역할
조선시대로 넘어오며
정자나 서원으로 대체

대곡댐 오르는 도로에
자리했었던 장천사
기와·청동북도 만들어
사찰 세력 컸음을 짐작
숙박 장소로도 이용돼
조선조 권섭 기행문서
대곡천 호랑이 목격담도

대곡천은 원래 울산 구곡문화의 요람이기에 앞서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대곡천변에는 곳곳에 사찰이 자리했다.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나가는 대곡천 경승 마다 명찰이 들어섰고, 이 곳에서 불경을 간행했다. 그 중에서도 장천사(障川寺)는 청동북(靑銅金鼓)과 기와를 만들어냈다. 원효는 대곡천변의 반고사(磻高寺)에 기거하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을 펴냈다. 대곡천에 피어났던 불교문화는 이후 조선시대로 넘어가면서 성리학의 발판이 되고 대곡천 구곡(九曲)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대곡천변에는 크게 네 군데의 절터가 남아 있다. 이름하여 백련사지(白蓮寺址 방리사지), 장천사지((障川寺址), 천전리사지(川前里寺址), 반고사((磻高寺) 등이 그 것. 이들 절터는 모두 대곡천이 휘감아도는 절경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때 유교가 숭상되면서 이들 절터에는 정자나 서원 등이 대신 들어섰다. 승려들이 북적거리던 대곡천변 절경에 흰 도포자락 휘날리며 유교경전을 암송하는 유생들이 북적거리게 된 것이다. 대곡천 시냇물은 이렇듯 천년 세월을 쉼없이 흘러 불교경전도, 유교경전도 다 들었을 터이다.
 

▲ 조선의 여행가 옥소 권섭. 권섭은 조선 후기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불교, 유교, 그리고 도교까지 통섭한 백련사지(白蓮寺址 방리사지)

백련사는 도와 최남복이 지은 백련정 자리에 있었던 절이다. 백련사지는 대곡댐 발굴조사에서 이름을 확인하지 못해 그냥 지명을 붙여 ‘방리 사지’라고 불렀으나 도와 최남복의 ‘백련산수기’에 이 절의 이름이 언급됨으로써 실명을 알게 됐다. ‘백련산수기’ 내용을 옮겨보면 그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백련정(白蓮亭)은 적취대(滴翠臺)의 앞쪽 땅 끝 쪽에 남향으로 세웠다. 그 오른쪽 곁에는 백련사(白蓮寺) 옛터가 있으므로 이름을 백련(白蓮)이라 한다.”

이 사찰 터에서는 건물 6동, 담장 4개, 배수로 2개, 우물 1개 등 모두 19개의 유적이 조사됐다. 건립 시기는 아래쪽의 장천사와 비슷한 8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존속했을 것으로 보인다.

백련서사(白蓮書舍)와 백련정은 도와 최남복의 백련구곡(白蓮九曲)이 시작되는 곳인 동시에 백련사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불교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 장천사가 제작한 청동북(범어사성보박물관 소장).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이 청동북의 제작내력을 자세히 알려준다.

◇호랑이 살고 있는 장천사지(障川寺址)

장천사는 8세기 전반에 창건돼 조선 후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9세기 후반에 폐사됐다.

울산대곡박물관에서 대곡댐으로 올라가는 도로에 있었던 이 사찰은 지난 2000년 한국문화재단 발굴조사에서 건물터 5동, 담장터 2개소, 배수로 10여개소, 원형 석조 1기, 집석유구 2기, 소성유구 7기 등이 조사됐다. 유물로는 통일신라 연화문 막새, 고려시대 어골문(魚骨文) 기와편, 청자편, 조선시대 분청사기·백자, ‘강희41년(康熙四十一年)’명 암막새가 출토됐다.

특히 ‘강희41년(康熙四十一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암막새는 장천사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기와에 새겨진 글을 번역해보면 이렇다.

“강희41년 임오년(1702, 숙종28) 3월 어느날에 장천사의 법당 기와를 조성한 일이다. 노주(老主, 사찰의 큰 스님)는 태능(太能) 승운 비구이고, 집강(執剛, 불사 때 전반적인 사무를 맡아 보는 승려)은 보감이며, 화주(化主, 불사나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소임)는 각희이다.

▲ 장천사에서 제작된 암막새. ‘강희41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이 암 막새는 장천사가 이미 모든 불교 건축과 교구를 만드는데 소위 ‘실 명제’를 도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와장(瓦匠, 기와 제작 기술자)은 장의백이며, 별좌(別坐, 공양간의 모든 일을 감독하는 소임)는 세탄이고, 공양주(供養主, 물품 조달을 맡은 직책)는 김두성·청익이며, 지전(持殿, 불전 청소나 향을 피우는 일을 하는 소임)은 초언이다.”

장천사는 기와뿐만 아니라 청동북(靑銅金鼓)도 만들었다. 부산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있는 국청사 청동북은 보물 제1733호로, 뒷면에는 청동북의 제작 내력을 알려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청동북의 명문을 해석한 결과 장천사가 바로 대곡천변의 장천사임이 밝혀졌다.

“경상도 경주부 남(南)의 연화산 장천사의 금기(禁氣)로 중량 백근을 들여 강희 5년 병오 삼월 어느 날에 주성(鑄成)하였다. 시주는 박충민·이막남이고 대장(大匠)은 태응과 신열·영득이며, 화주(化主)는 계호·설은·설암·설심이다”

이처럼 장천사는 청동북을 제작하면서 기술자와 화주 등을 일일이 열거할만큼 전문적인 노하우를 가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천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난다. <여지도서> 경상도 경주 사찰조에는 ‘장천사는 관아의 남쪽 60리에 있다.’고 했다.

장천사는 여행가들의 숙박 장소로도 이용됐다. 조선의 여행가 옥소 권섭(1671~1759)이 지은 <유행록> 가운데 울산에 왔던 내용을 기록한 ‘남행일록’의 한 부분을 음미해보자. 권섭은 1731년(영조7) 3월13일 장천사로 와 반구대, 집청정 등을 둘러보고 장천사에서 묵었다.

“가는 길에 포석정을 보고 천룡사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었다. 광의역과 장천사를 지나서 반구대를 보고 서원을 배알한 뒤 돌아와 장천사에서 묵었으니 70리를 다녔다…장천사는 비록 누추하지만 앞으로 큰 내(川)를 바라보고 있어서 아주 좋았다.…저녁에 내(川)의 남쪽에서 산보할 때 황백색의 큰 호랑이가 중턱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번 몸을 변화시키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권섭의 기행문에 나오는 호랑이는 그 색깔과 몸집 등을 감안했을 때 조선 호랑이가 틀림없어 보인다. 대곡천 반구대암각화 속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7000년 전 선사시대부터 대곡천 주위에 호랑이가 많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권섭이 장천사 앞 시내 주변에서 산책을 할 때 보았다는 엄청난 크기의 황백색 호랑이(大虎)는 혹 반구대암각화 속에 나오는 호랑이의 후손들은 아니었을까.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사진출처=울산대곡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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