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국민학교 동문 등 90여 가구 이주민 참여55년 만에 고향서 망향제 올리며 감회에 젖어수몰 위기 대곡국민학교 마을 위쪽으로 옮겨명맥 잇다 1984년 26회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마을의 중심 학교학교는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다.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학교에 의지했다. 그만큼 학교는 마을의 장래와 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다.1965년 축조된 사연댐은 한실
울산 공업센터 건설에 맞춰 축조대곡천변 한실마을 등 대부분 수몰매장문화재 발굴 조사도 없이 진행한실골 일대 문화재도 함께 물속에산골짜기 위치 16가구만 명맥 유지외딴 산길 하나뿐인 ‘오지 중 오지’◇수몰 주민들의 애환 담긴 사연댐대곡천에는 2개의 댐이 있다. 상류의 댐이 대곡댐이고 하류에 있는 것이 사연댐이다. 대곡댐에는 근처에 대곡박물관이 세워져 있어 수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그림들육상동물·고래·사람 등 생생히 묘사울산암각화박물관, 7년전 307점 확인기하학 무늬인 천전리 암각화와 대조당시 환경 유추할 수 있어수중동물중 대부분은 고래 그림으로고래 종류와 행동들 상세하게 묘사돼고래잡이 도구와 사냥 장면도 새겨져호랑이 그림도 10개…주서식지 추정반구대 암각화는 반구대(포은대)에서 대곡천을 따라 1㎞정
반구대 암각화는 ‘역사책’7천년전 태화강 변천과정 유추 가능고래서식·하상변화 답 찾을 수 있어고래 뛰놀던 古울산만·굴화만산으로 둘러싸여 자연 울타리 역할내해의 수초들 맛보러 몰려왔을 듯고래 얕은곳으로 좌초·포획 가능성암각화 고래그림 갈수록 줄어해안선 태화강 하류쪽으로 옮겨지고퇴적물에 수심 얕아지자 고래도 줄어선사인들의 사냥감 육식동물로 변해반구대암각화는 단
김창락 화백의 ‘울주 반구대 암각도’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민족기록화선사인 제의 의식, 사실적으로 묘사풍요·다산 기원했던 성소임 알려줘포경 알려진것보다 수천년 앞선 그림울산만, 7천년전부터 고래사냥 입증1970~1971년 동국대 문명대 교수팀천전리 각석·반구대 암각화 첫 발견◇반구대 암각화, 고래, 그리고 울산사람들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우리나라에서
울주군 대곡천 구하도에 형성된 ‘반구마을’사연댐 건설전까지 청안이씨 50가구 집성촌붓끝 닮은 모양 ‘문필봉’ 학자도 많이 배출일제때 창씨개명 거부 반구이씨로 통하기도연꽃 닮은 ‘연화산’ 주령 뻗은 곳이 반구대마을 둘러싼 7개 봉우리 7형제 호를 따 지어반구대에 있는 청안이씨 문중 정자 ‘모은정’정몽주 사모한 부친의 뜻이어 7형제가 건립대곡천 구하도(舊河道)
2018년 대곡천 퇴적물 걷어내자공룡 발자국 30개 추가로 발견육식공룡 발자국은 보행렬 뚜렷하류지역 수몰된 사연댐 아래엔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듯◇암각화 앞 공룡발자국천전리각석 앞 공룡발자국은 대부분이 초식 공룡이었다. 이 곳에 찍힌 공룡발자국은 대형 초식공룡인 한외룡(울트라사우루스)를 비롯해 용각룡 열마리의 발자국과 중형 초식공룡인 고성룡(이구아나룡
신라 왕족들이 직접 찾아올만큼아름다운 풍경 자랑했던 천전리525년, 을사년에 새긴 오른쪽 원명14년 뒤 새겨진 왼쪽의 추명에는방문자와 일시까지 기록돼있어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에는 청동기 시대부터 신라 말까지의 많은 그림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위 중간 부분 아래쪽에 있는 명문(銘文)이다. 을사명(原銘·525년)
화재·금령조치 등 10년 우여곡절 끝상남·하북면 유림 주축 1712년 창건정몽주 다녀갔던 반구대 앞에 자리경주 옥산·양동 문인들 도움도 받아옛 반구대 그림 속에서 형태 유추고종 5년인 1868년 철폐령으로 훼철지역 유림들 정몽주의 학덕 기리려유허비 3기 인근 곳곳 잇달아 건립1965년 현재의 비각으로 한데 모아◇언양 유림(儒林)의 성지 반구서원반구서원은 현
조선시대 불교 퇴락하며절터에 서원·정자 세워숙종 38년인 1712년 건립정몽주의 편지 글귀서‘반고’ 따와 서원명으로‘반구’와 한동안은 병용현재 반구서원 널리 쓰여울주로 유배왔던 정몽주‘독락당’의 주인 이언적‘남명집’ 편찬 참여한 정구3명의 위패 모셔져있어현재 반고서원 유허비(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 비각(碑閣)이 있는 장소의 바로 아래 평평한 자리에는
집청정 찾았던 문인들 시 엮은 ‘집청정시집’집청정 건립전 언양 유배됐던 권해 작품부터19세기말까지 시인 260여명 한시 406수 담겨울산부사·경상좌도 병마사·평안도 관찰사 등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글 만날 수 있어언양지역 문학의 발원지로 평가받기에 충분누정(樓亭)과 원림(園林)은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는 최고의 장소였다. 담양의 소쇄원이나 보길도의 부용동원
대곡천 일대 절경 그린 겸재의 ‘반구’권섭의 화첩 ‘공회첩’ 수록돼 알려져왼쪽 하단 집청정 추정 누각까지 생생권섭의 영호남 여행기 ‘남행일록’중반구대 일원 묘사 현재 모습과도 유사‘교남화첩’에 실린 그림 ‘언양 반구대’풍류 즐기는 조선 선비들 모습도 담겨대곡천 감입곡류가 만들어낸 절경은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도 표현됐다.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 유행한 화
수십억년 동안 물살과 힘겨루기한 결과집청정 앞 반구대 절벽 바위면 맨질맨질반구·포은대·옥천선동·학소대 글자부터부윤 박종경, 울산부사 임성운·유한식등고위 관리와 선비들 이름도 새겨져 있어감입곡류(嵌入曲流)가 딱딱한 암벽을 만나면 할 수 없이 물길을 비튼다. 제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하지만 수십억년 바위벽을 이겨내지는 못하는 법. 물이 직진의 힘을 빌어 암석을
깊은 산 사이 휘감아 흐르는 감입곡류하천삼척 오십천·울진 불영천·양양 남대천등동해쪽으로 흘러내리는 하천서 흔히 보여반구대-청령포 강 폭도 같고 역사성도 유사단종의 흔적 남아있는 청령포 북쪽 벼랑처럼반구대 북쪽 벼랑엔 유배됐던 정몽주의 흔적곡류하천(曲流河川)이란 좌우로 구불구불하게 진행하는 하천을 말한다. 뱀의 움직임과 비슷해서 ‘사행천(蛇行川)’이라고도 한
황룡사서 승려된 후 반고사서 사미승 수행‘삼국유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영축산(現 문수산) 혁목암의 낭지와 교류‘초장관문’‘안신사심론’등 왕성하게 저술울산지역 불교문화 확산에 큰 영향 끼쳐이후 분황사·오어사 기거 불교대중화 노력울산과 인근 지역에 관련 설화·전설 다수원효(元曉 617~686) 하면 울산과는 동떨어진 먼 옛날의 고승을 떠올리지만 실은
반구대암각화 최초 발견 동국대 문명대 교수울산 불교역사 실마리 찾으려 반고사터 추적1970년대 대곡천 일원 뒤지다 암각화 찾아내천전리각석 맞은편에 위치한 천전리사지통일신라시대 추정 기와·토기편들 발견돼반구대에 있었던 반고사, 원효 머물렀던 절조선 후기 그 자리에 반고서원이 들어서“동네 사람들로부터 무너진 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곡천을 따라 올라가니 건
신라시대 대곡천 일원절경마다 사찰 들어서구곡문화의 초석 역할조선시대로 넘어오며정자나 서원으로 대체대곡댐 오르는 도로에자리했었던 장천사기와·청동북도 만들어사찰 세력 컸음을 짐작숙박 장소로도 이용돼조선조 권섭 기행문서대곡천 호랑이 목격담도대곡천은 원래 울산 구곡문화의 요람이기에 앞서 불교문화의 산실이었다. 신라시대 때부터 대곡천변에는 곳곳에 사찰이 자리했다.
백련서사 지은 도와비록 지방향반이었지만성리학 경지 매우 높아고위층과도 두루 교류주자의 무이정사 본따평생 교육·수행에 전념도와가 꿈꿨던 이상세계‘녹문’ ‘도화동문’등바위에 새겨진 글자나현판·문집 등으로 유추구곡(九曲) 문화는 성리학(性理學)의 바탕 위에 쌓아올린 ‘인문학의 꽃’이라고 할만하다. 성리학은 공자의 예(禮)와 인(仁)에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도입한
조선 후기학자 도와 최남복백련서사 지어 후학 양성詩 ‘백련구곡도가’ 통해서1곡 국사봉부터 9곡 녹우담까지대곡천 아홉 구비 절경 노래주자에서 시작된 ‘구곡문화’은거지 주변 절경 ‘구곡’ 설정자연의 이치 몸소 체득하고성리학적 이상 실천하고자 해대곡댐 물 밑에 가라 앉은 대곡천은 아직도 강과 산으로 남아 있지만 그 물 밑에는 새소리도 없고, 금빛 노을과 옥 같은
청동기부터 주거지 형성삼정리 청동기 주거지 14동 확인하삼정 고분군 발굴 주거지만 7동많은 사람 거주, 각종 산업 발달 방증도자기·기와 가마터 발굴토기·기와가마부터 백자·숯가마까지청동기~조선시대 다양한 물건 제조단순한 하천 이상의 ‘산업단지’ 의미철 생산 중공업단지 역할도원료·연료·운반로 갖춘 제철 요충지로천전리 방리 야철지 가운데 제1호는18세기부터 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