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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기획특집지오그래픽 태화강
[지오그래픽 태화강]언양 유림의 성지,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령에 역사 속으로-다시 읽는 太和江百里 17. 반구서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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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25  20:5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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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구서원 비각을 중심으로 왼쪽 중·상단의 수풀지역은 옛 반구서원이 있었던 장소이고, 비각 오른쪽 하단에 있는 건물은 현재 반구서원 건물이다. 옛 반구서원은 반구대 벼랑 아래쪽에 자리했다. 원래 유허비들은 반구서원 인근에 제각각 홀로 세워져 있었는데 1965년 언양유림이 3기의 비석을 한데 모아 현재의 위치에 비각을 세웠다. 드론촬영=최광호

화재·금령조치 등 10년 우여곡절 끝
상남·하북면 유림 주축 1712년 창건
정몽주 다녀갔던 반구대 앞에 자리
경주 옥산·양동 문인들 도움도 받아
옛 반구대 그림 속에서 형태 유추

고종 5년인 1868년 철폐령으로 훼철
지역 유림들 정몽주의 학덕 기리려
유허비 3기 인근 곳곳 잇달아 건립
1965년 현재의 비각으로 한데 모아


◇언양 유림(儒林)의 성지 반구서원

반구서원은 현재 울주군 상북면에 해당하는 당시 언양현 상남면·하북면의 유림이 중심이 되어 공동 발의하고 재력을 보태어 건립을 추진했다.

반구서원은 1712년(숙종 38)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0년 전인 1702년(숙종 28)부터 건립이 추진됐다. 건립 과정에서 화재사건, 조정의 금령조치 등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관청의 도움은 별로 받지 못했다.

서원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언양 유림은 경주 옥산의 회재 이언적의 후손과 밀접한 교류를 했다. 언양 유림은 건축의 주요 일자 택일 등을 위해 여러 차례 옥산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고, 여기서 정구 선생이 반구대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편짓글도 보았다고 전한다.

신형석 대곡박물관장은 “옥산과 양동 문인들 가운데 정구의 제자가 있었다는 점은 언양 유림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구서원은 폐사지에 건립된 또 하나의 사례다. 원효대사가 머물며 저술활동을 했던 반고사 터에 서원을 건립한 것이다. 반구서원은 그만큼 경관이 좋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언양 유림은 포은 정몽주가 다녀갔던 반구대 앞을 서원 건립 장소로 선택했다.

<교남명승첩>에 들어 있는 그림을 보면 반구서원은 여러 채의 전각으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배치나 지붕 등의 구조를 보면 전형적인 서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서원 건물 외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있는데, 이 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구서원 뒤의 반구대 위에는 선비들이 올라가 풍류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 ‘교남명승첩’에 실린 반구대 그림.


◇유교의 흥망성쇠와 반구서원의 향기

반구서원은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헐어서 치워 버림) 되었다.

조선시대 서원은 중종에서 명종까지의 초창기, 선조에서 현종까지의 발전기,숙종에서 영조 초기까지의 남설기(濫設期), 서원이 정리되기 시작하는 영조 17년 이후의 쇠퇴기 등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순수한 학문을 표방했던 서원은 집권세력에 의해 자파 세력의 확대에 이용되면서 정치권력이 작용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에는 충신과 의사의 봉사(奉祀)가 성행하면서 남설(濫設·넘칠 정도로 많이 건설됨)이 사회문제화 되기 시작했다. 서원의 남설은 숙종 때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반구서원이 훼철되고 난 뒤 지역 유림은 반고서원 유허지에 포은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유허비 3기를 잇달아 건립했는데, 1885년의 ‘포은대영모비(圃隱臺永慕碑)’, 1890년의 ‘포은대실록비(圃隱臺實錄碑)’, 1901년의 ‘반계서원 유허비실기(磻溪書院 遺墟碑實記)’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 유허비는 196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반구서원은 1967년 사연댐이 건설되고 난 뒤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지난 4월20일 오전 11시 반구서원(원장 신동익)은 언양향교 복인규 전교, 김문웅 성균관유도회 언양지부장, 윤정록 울산광역시 시의원, 반구서원 운영위원, 언양지역 유림, 배향 3선현 종친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해년 향례를 거행한 바 있다.

신동익 반구서원장은 “언양 지역은 오늘 제향하는 3선현과의 연결고리로 유교가 뿌리를 내리고 진흥되었다”고 말했다.

이재명 논설위원 jmlee@ksilbo.co.kr

   
 

언양 유교의 뿌리
짐작해 볼 수 있는
市 유형문화재 13호


■반고서원 유허비

반구서원 훼철 이후 포은 정몽주와 서원을 기억하는 비석들이 세워졌는데, 비석 3기는 ‘반고서원 유허비’라는 명칭으로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됐다.

‘포은대영모비’는 1885년(고종 22년) 세워졌다. 이 비의 글은 언양 유림 천사(泉史) 송찬규와 학산(鶴山) 권필운이 지었다.

‘포은대실록비’는 1890년(고종 27) 세웠으며 송찬규가 글을 짓고 권필운이 썼다. 송찬규는 같은해 작괘천 바위에 ‘포은 정몽주를 사모한다’는 의미로 ‘모은대(慕隱臺)’라는 큰 글자를 새기고 그 아래에 ‘모은대기(慕隱臺記)’라는 글을 지어 새겼다. 송찬규는 1891년(고종 28) 7월에는 ‘포은대영모사(圃隱臺永慕辭)’라는 글을 지어 반구대 바위에 새겼다.

‘반계서원 유허비실기’는 1901년(광무 5) 2월 세워졌다. 언양군수 최시명이 글을 짓고, 김효동이 글자를 썼다. 이 비석의 이름은 반계서원으로 붙여져 있지만 그 전에는 반고서원 또는 반구서원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반고서원 유허비는 각각 따로 세워졌지만 후대 유림이 한 곳에 비석을 모아 비각(사진)을 만들었다. 이 비각은 포은의 공덕을 기렸던 언양 유교의 뿌리를 보여주는 산 증거다.

경상일보, KS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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