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 정해영은 울산에서 두 번에 걸쳐 당선되었다. 그가 국회부의장까지 지냈던 7선 국회의원인 것을 생각하면 울산에서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 한 시간은 길지 않다. 그런데도 울산사람들에게 그가 울산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 기억되는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으로 풀이된다.첫째 그의 집안이 울산 토박이었기 때문이다. 1915년 9월 울산군 하상면 진장리에서 태어났던
5대총선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 문을 두드렸던 신교환씨는 처음부터 승산 없는 선거전에 뛰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울산 갑구에서 그와 함께 경쟁을 벌인 김수선씨는 이미 초대와 3대 이 지역에서 출마해 지인들이 많았다. 또 다른 경쟁자인 최영근씨도 당시 국민들의 지지를 가장 많이 받았던 민주당 후보였기 때문에 그는 우선 지명도에서 이들에 뒤졌다.이런
5대총선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고기업씨가 중도에 출마를 접은 것은 순전히 사위 서일교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고씨는 출마 전 울산읍 의장과 읍장을 지내 울산 현안에 밝았고 양조장을 경영해 재력도 탄탄했다.조직 역시 울산읍 의장과 읍장을 지내면서 많은 인맥을 만들었고 특히 양조장 식구들을 선거에 가동할 수 있어 막강했다. 그러나 고씨는 이 때 이미 나이가
5대총선은 4·19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면서 4대 총선이 있은지 불과 2년 뒤인 1960년 7월29일 치러졌다. 이 선거의 특징은 양원제로 민의원과 참의원을 함께 뽑은 것이다. 이 선거는 4·19 학생의거로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치러졌지만 결과는 민주적이지 못했다. 개표 난동사건으로 13명의 민의원과 참의원의 당선이 확정되지 못한 속에 개원했던 5대 국회
1958년 치러진 제4대 총선 울산 을구에서는 민주당 김택천, 자유당의 김성탁, 무소속의 정해영 후보가 출마했지만 이중 김택천 후보는 들러리에 불과했다.이 선거에서 정해영과 김성탁 후보의 싸움은 단지 누가 국회의원이 되느냐는 정치적 싸움이 아니었다. 울산 출신으로 국내 연탄업계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었던 이들은 선거 전부터 피할 수 없는 악연을 맺고 있었다.
자유당의 전례 없는 부정 속에 이루어진 4대 총선에서 울산에서는 갑·을 두 지역 모두 자유당의 안덕기와 김성탁 후보가 당선되었다.4대 총선은 선거기탁금 제도와 자유·민주 양당의 공천제 영향으로 입후보자가 격감해 울산에서도 갑·을구에서 각각 3명이 출마했다. 후보자는 적었지만 자유당이 호헌을 목표로 전력을 투구해 울산에서도 부정 선거가 곳곳에서 자행되었다.따
해방 후 안정적이지 못한 우리 정치는 야당 인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울산에서 야당 인사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한 것이 4대 총선 때부터다. 이 무렵 이승만 정권이 호헌을 목표로 금권과 관권 선거를 휘두르면서 이에 항거하는 야당 인사들이 많이 나타났다.박정희 정권 때도 울산에서 많은 야당 인사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70년대 서슬 퍼런 유신정치가 시작될 때 목숨을
7대대선의 부정선거는 울산 정치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시민들은 이 선거를 계기로 여당인 공화당을 외면하고 한 달 뒤 있었던 8대 총선에서 야당의 최형우 후보를 당선시켰다. 또 당시 윤동수 시장이 선거 책임을 지고 구속되는 사태를 가져왔다. 이 때 윤 시장을 구속시켰던 인물이 유수호 판사로 대구 출신 유승민 국회의원 부친이다. 유 판사는 이 재판이 빌미가
최형우 의원이 야당생활을 할 때 오른팔 역할을 했던 김상두씨 역시 울산야당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김씨가 야당 인사가 된 것은 최영근 의원을 도우면서다.최영근 의원은 의정활동을 하면서 헌신적으로 일한 김씨를 비서관으로 기용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그러나 이 때마다 김씨는 “농촌에 살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내가 국회의원
이영채는 유신 때 김기홍, 정계석, 이일성과 함께 가장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울산 야당 인물의 한명이다.유신때 신민당 울산지구당 총무차장김기홍·정계석·이일성씨와 함께혹독한 고문 당했던 울산 야당 인사헌병대·보안사 등 고문에 못이겨유미빌딩 삐라사건 주범 거짓 증언학성이씨 문중의 탄원으로 석방오랫동안 최형우 의원 보좌관을 지냈던 이씨는 유신이 일어났을 때 신민
농소는 언양과 마찬가지로 야당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유신 때 연행되어 고생했던 정계석, 장창수, 안석호, 이영채씨가 농소 출신이고 북한에서 내려와 민주화 투쟁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손정룡과 이경수, 나중에 부산으로 가 국회의원이 된 박대해씨도 청년시절 모두 농소에서 야당 운동을 열심히 펼쳤다.이중 손정룡씨는 농소를 대표하는 야당 인사다. 시대적으
언양과 상북, 두동 등 울산의 서부지역은 헌정초기부터 유달리 야세가 강했다. 이 지역이 배출한 김수선, 오위영, 최영근 등 초기 국회의원들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강력히 야당활동을 펼쳤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할 때는 가톨릭농민회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지역이 이곳이다.이 지역 주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가장
필명이 방현석인 방재석(邦宰碩·55)씨는 오늘날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 있는 작가다. 특히 베트남어에 능한 그는 지난 2013년 EBS ‘세계테마기행’을 통해 베트남인들의 생활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또 를 출간해 요즘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그는 현재 모교 안성캠퍼스 부총장으로
자유당 시절 ‘민주당 나팔쟁이’라는 별명을 들었던 노재규의 삶을 보면 독재정치가 얼마나 잔인하고 민주인사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가를 알 수 있다.1930년 울주군 삼동면 작동에서 태어났던 노씨가 김택천 국회의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정당에 발을 들여놓기 전이다. 노씨는 해방 후 동아일보 울산 주재기자로, 성남동 학성여관에 미군이 주둔할 때는 통역
독재시절에는 야당활동도 힘들지만 야당 정치인을 돕는 일 역시 위험하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왜경은 독립 운동가들을 탄압했지만 이에 못잖게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사람이나 단체를 철저히 응징했다. 왜경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자금줄만 차단하면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박정희 정권이 독재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자들이
독재정권이 두려워하면서 미워하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밉게 본 신문이 동아일보였다면, 박정희 정권이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탄압했던 신문이 신민당 당보 ‘민주전선’이었다. 울산 범서읍의 전규열씨는 ‘민주전선’이 탄압받고 있을 때 이 신문을 울산 전역에 배포했던 야당 인사다.박 대통령이 독재정치
1958년 4대 총선 때부터 유세장 마이크를 잡았던 이일성씨는 울산 민주화의 산 증인이다. 그는 이 선거에서 자유당의 김성탁 후보 찬조연설을 했지만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환멸을 느끼고 이후 야당의 길을 걸었다.그는 울산이 배출한 최대의 달변가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 언변이 가장 좋은 정치인으로 8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이도선씨를 꼽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용우(李龍雨)씨는 해방 전후에는 울산문화의 선구자로, 자유당 시절에는 기자 신분으로 이승만 독재에 항거했던 인물이다.1919년 울산군 대현면에서 출생했던 이씨는 부친 종수 어른이 복산동으로 이사 해 울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종수 어른은 대현면에 살 때부터 울산은 물론이고 영남일대에서 명의로 소문 나 부자가 되었다.그는 용덕, 용문, 용우 등 3명의 아들을
1960년에 치러진 제3대 읍면의원 선거에서 20대 중반에 당선돼 울산 최연소 면의원 영예를 안았던 정계석씨는 울산 야당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1934년 북구 천곡동 속심이 마을에서 태어났던 그가 야당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54년 3대 총선 때부터다. 최영근 의원 보좌관을 지냈던 김팔용 초대 울산시의회 의장은 “4대 총선을 앞두고 최영근 의원이 나를
김성색(金成色)씨는 요즘도 언양, 두서, 두동 등 울주군 서부 5개면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야당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자유당이 집권했던 50년대 초만 해도 정부의 탄압이 심해 농촌에서 야당 활동을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최영근 의원 보좌관을 지냈던 박임근(82·서울 거주)씨는 “50년대 중반 우리가 야당 조직을 위해 두동과 두서에 가면 친인척들까지도 우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