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 당시 울산 무룡산과 기박산성, 농소 일대에서는 왜군과 의병 등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장편소설 <군주의 배신>의 주 배경이 되고 있는 관문성 일대 야산 전경. 고은희 수필가 제공

“맞아요. 봉사 나리가 글을 알았기 때문에 김 초시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수리안전답을 산 거죠. 그리고 이 땅들은 또 어떻고, 우리들 중에 아무도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이 황무지를 헐값에 사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무조건 배워야 해. 나는 원체 돌대가리라서 제대로 배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르쳐 주세요.”

“그래, 그러자. 대신 게으름을 피우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어련하시겠어요? 나리가 우리에게 검술훈련 시킬 때 보면, 이건 뭐 완전히 못된 시어머니 저리 가라던데요.”

“내가 그랬나? 싫으면 배우지 마. 나도 너희들한테 그거 안 가르치면 좋아.”

“아니 뭐,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치사하게 그런 걸 물고 늘어지십니까?”

“하하하, 미안. 안 그럴게.”

자꾸 이상한 쪽으로 얘기가 오가자 부지깽이(강목)가 얼른 말을 바꿨다.

“이 넓은 땅에 보리와 콩, 수수, 조, 기장 등을 골고루 심어서 추수할 생각을 하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거 같아요.”

“한 두락 정도는 여름철에 먹을 수 있는 참외, 수박, 오이 등도 심자.”

“그런데 이 난리 통에 수박씨는 어디서 구하지? 수박은 양반님들 전유물이잖아.”

“내가 그래도 명색이 양반이잖아. 허울뿐이기는 하지만. 조선팔도를 다 뒤져서라도 수박씨를 구해 올게. 그건 걱정하지 마라.”

“양반들도 여름철에 수박 먹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 올 농사만 짓고 나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겠지?”

“암,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그들은 송내마을로 돌아왔다.

“내일은 오랜만에 많이 뛰어다녀야 하니까 다들 오늘은 일찍 자둬.”

“알았어요. 봉사 나리도 잘 주무세요.”

동무들과 헤어진 천동은 부엌에 들어가서 아궁이에 장작에 넣어 구들장을 달군 후에 방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오늘 문득 국화 누이가 생각났다. 괜히 찾아가면 자칫 누이의 행복을 깨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동안 그는 가능하면 그녀에 대한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어엿한 양반가의 부인이 되었기에 이제는 자신이 양반의 신분이 되었다고 해도 찾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천동이 정말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녀를 알았었다는 사실조차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천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두레박을 타고 내려왔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그 전설의 주인공이 국화 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서야 그는 겨우 잠이 들었다.

글 : 지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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