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들은 타인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는다. 모든 정보가 휴대폰에 저장돼 있기 때문에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애써’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거나 암기하는 것은 마치 구시대적인 방식으로, 고차원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처럼 취급받는다. 그러나 암기력은 학습의 기초이자,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기본 능력이다. 밥을 먹는 순서, 샤워를 하는 일련의 과정도 암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 속 많은 행동들이 암기를 통해 형성되고,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암기는 우리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인 셈이다.
다행히 기억력은 지능, 즉 IQ와 크게 관련이 없다. 누구나 계발할 수 있고,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향상시킬 수 있다. 어린아이라면 동요 가사나 짧은 동시를 외우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숫자 기억 훈련도 좋다. 무작위 숫자를 불러주고 그 순서대로 외우게 하는 방식인데, 숙련될수록 숫자의 양을 늘려나갈 수 있다. 숫자 대신 무작위 단어를 불러주는 것도 좋은 훈련이 된다. 초등 고학년이라면 조선시대 임금들의 이름을 순서대로 외우는 것도 공부에 큰 도움이 된다. 사실 암기할 수 있는 것에는 특별한 제한이 없다.
효과적인 암기 전략으로는 ‘반복, 이야기 만들기, 덩어리 묶기, 단순화하기’ 등이 있다. 먼저, 반복적으로 정보를 접하면 나도 모르게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감각을 함께 활용하면 더 좋다. 손으로 쓰고, 눈으로 보고, 소리 내어 읽고, 귀로 듣는 식이다. 시각, 청각, 운동 감각이 함께 자극되면 암기 효과는 훨씬 높아진다. 또한, 이야기 만들기 전략도 유용하다. 예를 들어, ‘가방-병원-머리카락’이라는 단어들을 외워야 한다면, 단순히 나열하기보다는 ‘가방을 메고 병원에 갔는데, 머리카락이 길어서 더웠다’처럼 간단한 이야기를 만들어 외우면 훨씬 기억에 잘 남는다. 숫자나 단어를 덩어리로 묶어서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예컨대 ‘1378456946’이라는 숫자를 ‘137, 8456, 946’처럼 묶으면 더 쉽게 외울 수 있다. 단순화 전략도 효과적이다. 조선 왕의 이름을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줄여 외우는 방식은 오랫동안 기억되는 대표적인 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되었어도 이 단어는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가?
기억해야 할 것을 휴대폰에 저장하면 머리가 편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편함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 두뇌는 점점 덜 쓰이게 되고, 뇌의 시냅스도 점차 단순해진다. 디지털 기기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스스로 기억하고 암기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억력은 단지 정보를 저장하는 능력을 넘어서, 인지능력을 발달시키고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 같은 고차원적 사고력을 길러주는 기반이 된다. 기억력은 결코 천대받을 능력이 아니다.
김보아 울산 화진초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