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사연구가 이유수씨에 따르면 달천광산은 삼한시대부터 있었다.  그는 "3세기에 편찬된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말하는 중국까지 철을 수출했던 변진의 철산지가 달천철장이었다"며 "철기시대로 들어간 BC 3~4세기께부터 쇠를 생산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지난 1993년 철제갑옷과 다량의 철제무기가 발굴된 중산리 유적을 비롯해 농기구와 철모 등이 출토된 웅촌 하대유적과 다전동 고분군 등을 제시한다. 그는 "아울러 중산리 고분군이 달천철장을 지배했던 모화지방의 지배계급들의 무덤이었다면 달천에 가장 가까운 농소면 상안동의 동산고분군은 철광에 종사했던 사람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달천철장은 쇠의 함유량이 높고 채광이 용이한 천혜의 광산으로 한말까지 2천여년에 걸쳐 한반도 제1의 수철공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68년까지 등록광구가 20만평이었고 1964년 현재 잔여매장량이 142만4천400MT에 이르렀다. 이 중 철 함유량은 41.8%로 연간 생산계획량은 8만5천MT로 기록하고 있다. 1960년까지는구릉지대에서 토철을 채취하고 왔으나 이후 지하에서 채굴했다.  철장은 조선에 접어들면서 전국 60개소가 넘는 철산지 가운데 생산량이 풍부한 곳은 국가가 관리했고 지주사가 철장관을 겸했다. 지울주사 이종주에게 내린 정종 1년(1399년)의 왕지를 통해 울산의 달천철장도 국가가 관리한 것을 알수 있다. 달천철장에서는 수철 뿐아니라 백동철도 산출됐다. 지금의 신광산으로 불리는 곳이 놋쇠를 상징하는 "퉁"자를 써서 퉁뫼산이라 불렸던 것으로 보아 이 곳에서 백동철도 생산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달천철장에서는 태종 때 백동철과 수철 생철 1만2천500근을 공물로 바쳤고 예종 때는 정철 479근을 세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공액이 줄어든 것은 생산량의 감소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철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대납제가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6세기 후반에 들어 철장이 국가관리를 벗어났고 달천철장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진다.  달천철장의 역사는 다시 효종 8년(1657년)에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사람인 이의립에 의해 다시 이어진다. "경주이씨관란선생세보" 〈구충당이의립선생전〉에 따르면 달천철장을 재발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유수씨는 선대의 묘가 달천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달천철장과 연고를 맺고 채취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며 그가 효종의 북벌정책으로 군수산업이 일어나자 나라에 쇠를 바침으로써 달천철장의 역사가 다시 기록되고 그는 그로 인해 신분상승의 은전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가 14년간이나 전국을 돌아다녔던 것은 다른 광산을 찾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이의립의 13세손까지 대를 이어 달천철장을 관리하다가 한일합방이 되기 전1906년 달천광산은 일제에 넘어갔다.  달천철장은 해방을 앞둔 1943년 다시 개인에 돌아왔고 1964년 12월 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라는 국영기업으로 다시 태어났다. 1966년 기계 선광장을 준공하여 하루 500톤을 생산했고 그해 12월 다시 민영화되었다.  이때까지는 구릉에서 철을 채취하다가 1974년부터 굴을 파기 시작했다. 최초로 60m를 파들어갔다. 그 뒤 점진적으로 깊이를 더해 1986년에는 심도 335m까지 들어갔다. 생산량도 1981년 월 1만3천톤으로 늘어났고 1990년에는 1만5천톤으로 증설됐으나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1993년 철광석 생산작업이 종료됐다. 현재는 사금석만을 채취하고 있다.  상호도 1982년 삼미광업개발(주) 울산광업소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에서 1987년 대한철광개발(주) 울산광업소로 바뀌었다가 1996년 삼미금속(주) 광업사업본부로 개칭됐다. ---------------  〈이의립〉  "아아 임진왜란과 병자란 뒤 몇백년동안 무비가 풍족하고 남북이 안정된 것 어찌알랴. 이의립의 공이 아니가를. 동토(東土) 수천리를 둘러 백성의 살림살이 편리하게 쟁기로 밭갈고 솥으로 밥짓는 것 어찌 알랴. 이의립의 덕이 아닌가를. 이로써 패를 주어 종자 종손으로 하여금 백세풍성(百世風聲)을 세우게 하노라"  이는 숙종이 이의립이 숨진 뒤 그에게 내린 사패문(사패문)에 전하는 글이다.  월성(경주)이씨의 자손인 이의립은 광해군 30년(1621년)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당시 경주부 남전읍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자식으로서 봉양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의 자식이라 할 수 없고 백성으로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순국의 성을 다하지 못하면 신하라 할 수 없다" 하였으나 10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21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라를 위함에 있어 어버이 섬기는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그는 국가의 큰일에 병력과 농사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다 하며 무쇠를 찾아나섰다. 그는 14년동안 가야산 삼각산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백두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청량산 등지를 돌며 철장을 찾다가 38세 되던 해 1657년 효종 8년 종부의 산소가 있는 달천에서 광맥을 발견했다.  그는 2년 뒤인 1659년(효종 10년) 토철을 용해하는 제련법까지 터득해 조선조의 무쇠생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졌왔다. 그는 이듬해 궁각 280톤, 함석 100근, 선철 1천근, 등을 훈련도감에 바치고는 현종으로부터 동지중추부사(중추부에 속한 종2품)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는 유황석도 발견했고 그에 따른 제조법도 개발했다.  그 공로를 인정해 조정은 평안서도 도호부사에 임명했으나 그는 벼슬을 사양하자 현종은 3대에 걸쳐 가선대부(종2품)의 벼슬을 내리고 달천광산을 하사받았다.  그의 후손인 이영태씨(울산시 중구 반구동 강동한의원장)는 "구충당은 부모에 지성의 행자로서 생애를 마친 분"이라며 "이 지성은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나라에 대해서는 충의로 나타났으며 백성에게는 인애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구충당의 묘소는 전읍리에 있으며 해마다 그의 후손들이 참배하고 있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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