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불과 빛의 역사를 문헌상으로 찾는다면 가장 앞자리에 쇠부리가 놓인다. 삼한시대부터 철이 생산되었고 유통과 무역에 있어 철은 화폐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쇠부리와 달천철장에 대해 (상)삼한 때부터 쇠부리가 행해졌다 (중)달천철장과 이의립 (하)쇠부리놀이로 나누어살펴본다. 울산이 공업도시로 성장할 것은 이미 삼한시대에 예고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울산시 북구 농소3동 달천마을에서는 삼한 때부터 철이 생산돼 널리 중국에까지 철을 공급했고 조선 때는 생산량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철장으로 꼽히던 곳이다. 공업의 원천인 철 생산지라는 사실은 돌이켜보면 울산이 근대 우리나라 최대 공업도시로 지정되는 예견과도 같은 일로 여겨진다. 철생산은 곧 울산의 "불과 빛"의 역사의 본격적인 개막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울산사람들이 "쇠부리"라고 부르는 제련작업의 시작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조〉와 〈후한서〉에는 "변한지방의 철은 특히 유명하며 삼한사회는 물론 동예와 위에까지 팔렸으며 모든 매매에 있어서 마치 화폐와 같은 기능으로 유통됐고 또 낭랑과 대방을 거쳐 중국에까지 공급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철이 대량 생산되었고 그것은 제련을 거쳐 일정한 형태가 되어 무역에서 화폐처럼 통용되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철 생산은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산업으로 여겨졌고 주요산지가 달천이었다는 것이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해 드러난다. "철장 재군북달천리 산 백동철 수철 생철 세공생철 1만2천5백근(鐵場 在郡北達川里 産 白銅鐵 水鐵 生鐵 歲貢生鐵 一萬二千五百斤)"이라 기록하여 울주군의 북쪽 달천리 철장에서 백동철 수철 생철이생산되는데 그 중 세공으로 생철 1만2천500근을 냈다고 전해진다. 이 때 경상남북도 지역에서 두루 철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울산이 가장 많은 공물을 바쳤고 다음으로 합천이 9천500근, 상주가 8천867근 등의 순으로 나타난다. 그 후 다시 정종 1년(1309년)에 이종주 지울주사에게 내린 왕지에서도 달천 철장의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왕지에는 "이종주위통정대부 지울주사 병마단련사 울주철장관자 건문원년정월육일(李從周爲通政大夫 知蔚州事 兵馬團練使 蔚州鐵場官者建文元年正月六日)"이라 하여 지울주사가 농사와 병사는 물론이고 울주철장의 관리자를 겸하도록 명시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종 때까지 나타나던 철 생산에 관한 기록은 잠시 멈추어 버린다. 원인을 정확히 명기한 기록이 없지만 300여년이 지난 1657년 효종 8년에 구충당 이의립이 울산 달천광산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 사람인 경주이씨 이의립은 14년동안 전국을 헤맨 끝에 그의 나이 38세에 달천에서 철산지를 발견하고는 "나라의 일에 병과 예보다 더 필요한 것이 없으며 솥과 농구는 무쇠가 없으면 만들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2년 뒤에 토철을 용해하는 제련법까지 터득해 궁각 280톤, 함석 100근, 선철 1천근, 수철환 73만개, 솥 가마 등 부엌에서 쓰는 그릇 440좌 등을 훈련도감에 바쳤다. 그로인해 그는 현종으로부터 동지중추부사(중추부에 속한 종2품)에 제수받았다.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이의립의 가문에서 달천광산을 경영했으나 13세손 이은건에 이르러 일제의 침략으로 광산을 빼앗겼다고 전해진다. 철의 생산은 반드시 제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울산의 인근에는 쇠부리터가 수없이 많았다. 달천을 중심으로 철을 녹여낼 연료가 되는 목재와 물, 인력이 풍부한지역을 찾아 경상남북도에까지 널리 쇠부리터가 확장되어갔다. 경제학자 권병탁 전영남대교수는 지난 1962년 조사에서 울주군과 경주 청도 밀양 등지에서 82개소의 쇠부리터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 후 다시 9개소가 더 발견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들 쇠부리터로 철을 운반할 때는 소달구지나 사람이 등짐을 져서 날랐는데 그 길이피난길처럼 이어졌다고도 전한다. 대곡리 한실마을에서 마지막까지 쇠부리터를 운영했던 사람으로 오석봉씨(울산시 중구 학산동)의 조부가 꼽힌다. 제련소는 울산사람들에 의해 쇠를 부린다(조종하다)는 뜻의 "쇠부리터" "점" 혹은 "점터" "점쇠"로 불렸다. 지난해 대곡댐 수몰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대곡리 인근 방리일대에서 야철지와 제련과 관련된 유적 9기를 발견했다. 자연경사단을 이용한 장방형의 제련로는 길이 224m, 너비 131㎝, 높이 153㎝로 할석을 쌓아 기초부를 형성한 뒤 노벽을 쌓아 올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 유구는 울산문화원(원장 서진길)이 문화원 뜰에 이전 복원하기로 하고 현재 유구를 옮겨다 놓았다. 울산문화원은 오는 3월까지 이 제련로를 복원해 울산시민들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