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영 마을에는 선바위에서 쭉 이어지는 강을 따라, 자전거도 탈 수 있고 천천히 걸으면서 운동도 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산책로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살짝살짝 올라오는 탄성 때문인지 걷는 운동이 살짝 재미있기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뽀얗게 올라오는 예전의 오래된 흙길의 아쉬움도 생긴다.거칠고 구불구불한 길, 한걸음 디딜 때마다 모래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한다.…… 헤르만 헤세 소설 중에서새는 새로운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알의 껍질을 깬다. 그 알은 바로 그 새의 기존 세상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 바깥·세상에서 드디어 날개를 펴고 드높은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수 있으리라. 비로소 새는 새
학교 하면 뭐가 떠오를까? 아슬아슬한 등교시간, 준비물 사느라 붐비는 문방구, 왁자지껄 시끄럽지만 재미있는 교실, 역동적인 운동장, 짧은 쉬는 시간에 간식을 다 먹느라 애쓰는 매점, 들락날락 탈의실, 귀에 거슬리는 수업 종소리, 적당한 요령이 난무하는 청소시간, 담임의 잔소리, 교복과 체육복 등 여러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런 이미지의 공통된 느낌을 한 마디
4년 전 할레드 호세이니의 을 읽고 고등학생들과 독서 토론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매일 폭격과 총성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은 평화롭고 풍요한 우리나라에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한 학생이 내게 물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블랙독’의 주인공 고하늘은 대치고의 기간제 교사이다. 수학여행 버스 전복 사고에서 자신을 구한 선생님을 잃고, 그때부터 그녀의 목표는 교사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들 앞에 서고자 했던 강한 동기가 있었기에, 고하늘은 기간제 교사이긴 하지만 교사가 된 자신을 대견해 하며 학기 시작 전 텅 빈 교실에서 두 주먹을 움켜쥐고 눈물을
어린 시절 설날이 다가오는 추운 겨울밤, 간간이 “복조리 사이소~! 복조리”라는 소리가 들려오면, 저녁 내내 기다리시던 어머님이 얼른 나가 조리를 몇 개 묶어 사 오시던 기억이 있다. 조리에서 나는 특유의 향과 까칠까칠한 촉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정월 초하루에 만들어 파는 조리는 특별히 복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복조리라고 불렀다. 이른 새벽부터 조리장수가 조
방학 지낸 교정이 궁금하여 걸었다. 뒤뜰에 흰매화가 두세점 피었다. 홍매도 오동통 어여쁘다. 양지바른 곳 명자나무 꽃봉오리 한두 개 볼그레하다. 생명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솜털이 화사한 목련나무 겨울눈을 보니, 옮겨가는 학교에서 만날 아이들이 궁금하다. 이곳의 아이들과 얼마나 다르고 같을까, 어떤 수업이 좋을까, 온갖 생각들로 몸이 긴장으
교사에게 첫 시간, 첫 번째 만나는 학급이 중요하다. 그 날의 수업 흐름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첫 교시를 잘 보내면 하루가 잘 풀리고, 첫 교시에서 뭔가 삐걱대면 다음 수업 또한 매끄럽지 못하다. 뻔히 알면서도 오늘 첫 반 수업부터 실책을 범했다.“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수업했니?” 필자는 수업 마칠 때마다 ‘O반 OO페이지까지’라고 살짝 메모를 해둔다. 이
나는 한문 교사다. 나름 한문 교사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한문이라는 과목을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떻게 보면 이 자부심은 지난 시간 나의 최선에 대한 훈장일 것이다.3월 첫 한문시간마다 학생들에게 말한다. “여러분! 한자 외우지 마세요!”라고. 아이들은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뭐지? 저 선생님은? 이런 표정
다시 한 해의 시작이다. 해가 바뀐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이 시기가 ‘나’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는 계기는 된다.해가 바뀌고 첫 출근날에 일 년 묵은 책상을 정리했다. 책상과 책꽂이를 뒤져 보니 별의별 것이 다 나온다. 수업에 활용하려고 만들었다가 묵혀 둔 ...
“내년 3월에는 어느 곳에서 지내게 돼?” “저,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에요?”“그게 무슨 말이야?” “좋은 학교가 아니라서요.”“원하던 곳이 아니었어?” “원하던 곳이긴 한데. 서울에 좋은 학교가 아니라서요.”“…….”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가슴이 답답해 숨을 골랐다. 12월 어느 날, 한 아이와 나눈 이야기 일부이다.이즈음 교
“선생님, 여고 45회 강대옥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교육공무원 연수의 쉬는 시간, 아는 얼굴이 있나 싶어 두리번거리다 고등학교 은사님을 뵙게 되었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장면들이 휘리릭 지나갔다. 야간자율학습 빠지려고 배가 아프다는 거짓말도 했었고, 시인이 느낀 슬픔에 대해 말씀 하실 때는 ‘이런 시를 배우는 게 더 큰 슬픔이야’라며 툴툴거리기도 했었
매해 이맘때쯤이 되면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던 나의 생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 혹은 꼭 기억해야 할 일, 때로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곱게 채색되어 있는 기억도 있고, 때로는 망각이라는 편한 장치로 떠나 보낸 나의 역사도 그 안에는 있을 것이다.며칠 전, 학창시절 친구가 단톡방에 올린 그 시절 우리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다시
어느덧 12월. 연말이네요. 현재 근무하는 학교에 오래, 아주 오래 있었기에 내년이면 다른 학교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낯설고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남은 시간을 어떻게 잘 마무리할까 하는 고민으로 잠을 설치고, 딱 1년만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바람을 안고 학생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합니다.2013년 2월. 정기 전보 인사 발표가 난
영화 는 두 가지 버전의 영화 포스터가 있다. 첫 번째 포스터 속 주인공 빌리의 모습은 발레하는 여자들 사이에서 경직되고 위축된 채 권투 복장을 하고 있다. 두 번째 포스터 속 주인공 빌리는 발레복을 입고 즐거운 표정으로 함께 발레를 하는 모습이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영국의 1984년으로, 아버지는 탄광촌 광부이다. 당시 영국의 대처 정
“여학생 교실이 왜 이렇게 더럽니?”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이 말에서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변했다. “교실이 깨끗하면 좋겠지만, 여학생 교실이라서는 아니잖아요?”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렇게 말도 할 것이다. “남자가 뭐 그 만한 일로 울고 그러냐?”라는 말은 어떤가? 남학생들은 곧장 그 말의
방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고,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아주 오래전, 밤새도록 소리 내어 운 날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가까이 취업 공부를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그러다 한날은(아마도 대학을 졸업하고 먼저 직장에 들어간 동기생을 만났던
전국적으로 교원평가가 확대 실시되기 전부터 우려와 걱정의 목소리가 높았다. 자유반응식 평가(현 자유서술식 평가) 란에는 욕설과 비난이 난무할 것이라고, 젊고 예쁜 교사들 기나 살려주는 인기투표가 될 것이라고, 교사들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시한다는 목적은 온 데 간 데 없을 거라고. 걱정은 곧 기우가 아닌 현실로 나타났다. 학생 만족도 조사 결과는 최선
그럴 때가 있다. 세상에 버려진 기분, 나 혼자 외딴 섬에 고립된 기분,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있는 기분, 따가운 눈총이 느껴지는 기분, 이 모든 것들을 느끼는 그런 날이 있다.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놓은 학생은 한 둘이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하소연은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행한 감정
실시간 검색어에 ‘가갸날’이 1위에 오른 것을 보고 ‘한글날’을 실감한 10월9일 아침. 태극기 게양을 위해 집 이곳저곳을 수색하다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아파트 베란다로 고개를 내밀어 다른 집들을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태극기를 게양한 집이 없어 슬그머니 태극기 찾기를 멈췄다. 마음 한편이 불편한 가운데 오늘의 뉴스를 보려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