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불모지 울산에 화랑 열어울산시의회 진출로 2002년 문닫아시의원 시절에도 화가 지원에 앞장은퇴후 치매 앓던 어머니 돌보며예방·치료에 미술의 중요성 깨달아노인·어린이 미술교육에 헌신중지난해 말 울주군 범서읍 천상에 있는 울주문화예술회관에서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의 제4회 그림 전시회가 열렸다.이 전시회를 찾은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지도한 미술교사가 울산
1927년 청량면서 태어나 경주서 그림 배워안동중학교서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결혼도1960년대 서울로 이주, 전업화가의 길 걸어비주류 수채화로 국전서 특선도 두차례나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화단에 명성도 떨쳐프랑스 유학후 전시회 거듭할수록 빚 늘어80세때 포항 이주 작가활동…2013년 타계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산 중구청 지하식당 입구에는 부산컨트리를
구소방서 인근에 첫 역사 들어서철로 폭 좁은 경편철도로동부영남지역 물류수송 담당1935년 역사 학성동으로 옮기자옛 역사 자리에 관사 30여채 세워울산 최대·최고의 주택단지 조성1980년대 번화가로 변모하면서장사꾼들에 밀려 대부분 사라지고1채만 일제강점기 관사 그대로 유지황주경 시인이 최근 울산의 한 주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은 우리
다끼 여사, 일제강점기 남편 구와바라가 울산경찰서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주해방전 남편이 다른여자와 살림차리자 삼남면 진장마을서 누에 키우며 생활이후 남편 유산과 자신이 잠업으로 번 돈으로 언양 발전에 지대한 영향 끼쳐농림전수학교 이전과 언양중 전신 울산공립농업보습학교 건립에 재산 희사구와바라 다끼 여사는 구소 이호경, 이효정과 함께 울산근대사에 가장 영향을 끼
일제시대, 모직 귀했고 국민복 권장해방후에도 비싼가격에 거의 못입어양복 한벌 가격 = 교사 5~6개월 월급80년대 중반 울산내 양복점 360여곳울산 최초 대규모 양복점은 ‘백합사’지금은 기성복에 밀려 10여곳으로울산시 중구 시계탑 사거리에서 우정동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양복점이 많다.시계탑 인근만 해도 모모양복점, 김도용양복점, 최병원테일러, 우일양복점,
3·1운동 전후로 울산 곳곳 청년회 조직…언양청년회, 언양 3·1운동에 앞장순회강연·야학·사립양명학교 창설 등 항일운동 바탕으로 면민 권익 도모회장 신근수, 업적비 제작 추진중 일제탄압으로 작은바위에 ‘靑史臺’ 글만‘민족 자주정신 청사에 남으리라’ 의미…독립운동가 비밀모임 장소이기도울주군 삼동면에 있는 작괘천에는 인내천, 선무원종공
1896년 동구 남목서 태어나일산진서 후리어장 운영, 큰 돈 벌어해방 되면서 교육사업에 투자사유지 3만4천평과 거액 내놓아1947년 방어진수산초급중학교 세워30년간 동구 유일 중등교육기관 우뚝1959년 ‘방어진중학교’로 공립 전환1990년 화정동 이전…본터는 수련장수련장 인근에 산소·송덕비 자리울산교육사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울
정조 23년 온산면 원강마을에 건립엄공의 17대 손 엄주환씨 집례로엄창섭·이채익 매형·허언욱 장인 등울산 엄씨 종친회 대를 이어 향사귀중한 유교문화 ‘전국 재실 향사’‘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노력‘조선충신’ 문구 새겨진 엄공 비석울산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 등충효정신 알리는 체험장으로 계승지난 11월6일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원강서원에서는 조선 충신
울주군 온산면에서 태어나국제신문-조선일보 등 거쳐언론인·작가로 왕성한 활동국회의원 질의서 써주기도경남일보 창간한 추전 김홍조일제시대 기자 박병호·김기오동아일보 월남특파원 김치석 등옛부터 울산 출신 언론인 많아우리나라 언론사에서 울산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우리나라에서 언론인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한 것은 일제강점기 3·1운동 후다. 이 때 일제가 소위 문화
1965년 서울서 창립된 일요화가회김종필 전 중정부장 참여해 유명세울산일요화가회는 1972년 4월 창립3·5대 회장 지낸 노용택 화백 추진1993년 전국대회 350여명 참가 성료울산미술협회가 그동안 울산의 수준 높은 화가들을 배출했다면 울산일요화가회는 울산미술인들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울산미술사는 1993년 발간된 에 잘 정리되어
입상자, 부산일보·국제신문에 보도신문 통해 울산 전체에 알려져학성공원 백일장 장원 출신에권정식 제독·최종두 시인·양명학 교수1974년 재건학교 여중생이 장원해 화제울산은 해방과 함께 김태근·김어수·이상숙·박상지가 중심이 되어 문학 활동을 이끌어갔다. 시기적으로 이들이 활동할 때 보다 조금 늦게 개최가 되었지만 울산 문학의 꿈나무들을 키웠던 학성공원 백일장에
5·16 군사정권이 용공으로 지적한교원노조의 고문이었던 이병주10년형 선고 받고 2년7개월간 옥살이평생 박정희 대통령 미워했지만출옥 도운 이후락과는 친하게 지내10대 총선서 우석 지지글 기사화도이후락, 권좌에 물러난후이병주 통해 자서전 발간 준비했지만전두환 정권 출범하면서 계획 접어최근 중앙언론들은 일제히 박근혜 전 대통령의 옥중 생활을 보도했다. 박 전
대형 토기 가마터가 발견됐던동구 서부동·화정동 유적지 등제대로 된 지표조사·발굴 전무동구문화원 민속박물관 건립 목적동구민 소유 각종 유물조사 실시항아리형 토기·굽다리형 접시 등지역 출토 토기 대부분 주민 소장신석기 돌화살촉 보관하는 사람도신라의 수도 경주와 가까운 울산에서는 곳곳에서 많은 토기가 발굴되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서생면 신암리에서 발굴된 즐문토
시신 거두면 삼족 멸한다는 어명에도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선산에 모신 뒤 삼동면에 숨어 살아충의공이 죽은 뒤 인근 작동에 묻혀이후 숙종때 충의공의 충절 알려지고영조는 ‘조선의 충신’으로 높이 사충의공 엄흥도 모신 온산읍 원강서원최근까지 문중중심 향제 지내며 추모박제상의 충절로 ‘충효의 도시’로 불리는 울산에는 재실이 많다. 이들 재실 중 충의공(
젊은시절 결핵과 싸우며서울서 기성작가로 활동하다장사하는 오빠와 울산에서 생활후배들의 문학활동 지도에 힘써나중에 오빠 따라 서울서 활동30여년 지나 발간한 시집에‘잘있거라 울산만’ 담아울산 향한 그리움 표현해방 후 울산에는 김태근, 김어수, 이상숙 등 개인별로 문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문단이 이루어진 것은 1965년이다.이 무렵 울산의 김어수
中 국민군-공산군 싸움 피해 한국행1966년 화교학교 교사로 울산에 와중국집·서예학원 운영하며 정착서도회와 교류하며 문화발전에 기여1981년 시립도서관 건립때 큰돈 기부지역 사업가에 자금 선뜻 빌려주기도해방을 전후해 울산에는 많은 화교들이 살았다. 화교들이 운영한 식당만 해도 신성원, 신생원, 북경원, 신려도 등 적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중국 음식은 ‘청
울산 출신 효재 이승민 화백중학교 졸업할때쯤 해방되자부산 거쳐 서울 삼촌댁에서 생활인사동 화랑 드나들며청전 선생의 그림 어깨너머로 배워우연한 기회 친척 도움으로 철원행월정리역 반파된 열차 화폭에 옮겨국방부에 그림 선사한뒤 유명해져그림 재구성·인터뷰 요청 빗발2012년엔 고향 울산서 전시회도울산사람들 중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제목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많
1974년 주전어촌계장으로 있을때온산·진하 등 전복양식 소식 듣고주전앞 선돌바위 일대 종묘 뿌려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대상 받아청와대·해외도 주목…TV방송도지역 농민들 위해 홈골저수지 축조제당 통합으로 재물 낭비도 막아울산 동구 주전 마을은 60년대 초 울산이 시로 승격된 후에도 한동안 울산의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전이 새마을운동을
1927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나심상소학교 나와 조합비 수납일 맡아매일 방어진 일대 누벼 지리에 밝아해방 이후 19세때 日 히나세로 돌아가2011년 친구 아들 울산 방문소식 듣고옛 기억 회상하며 설명도 곁들여 그려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과 중국인들에 비해 조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질서를 잘 지키고 기록을 좋아하는 것도 일본인들의 특징이다
울주군 서생면 평동마을 출신으로동래고보 시절부터 항일운동 펼쳐왜경 피하려 폐결핵 환자로 연기도항일 행적 1931~1936년 신문에 보도해방후 좌익의 길, 가족들까지 고생부산에 살다 경찰에 체포되고부인이 삯바느질로 가족 먹여살려두딸 “항일운동가 아버지 자부심”이미동은 일제강점기 울산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그의 항일운동 행적은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