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라는 이름을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기분에 젖어든다. 7000년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는 곳, 그 신비감으로….또한 그 곳이 알고 보니 내 고향 울산에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마치 우리 집 장롱 안쪽에 숨겨 놓은 보물처럼 뿌듯하기도 하고 은근히 “반구대? 그거 우리 고향에 있잖아”하며 자랑하기도 한다.우리 겨레가 갖고 있는 유물 중 가장
반구대암각화 보존을 위한 카이네틱 댐(가변형물막이 댐)은 검증 실험 및 설치 과정에서의 안전성, 울산권 맑은 물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5년까지라는 한시성, 그리고 댐 해체 시 암각화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가역성을 전제로 하고 진행 중이다. 댐은 당초 금년 말까지 설치 완료하기로 하였지만 실험모형 설치안의 누수문제 등 안전성 논란에다가 설계 지
반구대암각화의 보존대책 논의는 45년 전 발견시점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1972년 당시 윤주용 문공부장관은 가뭄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반구대암각화가 다시 물에 잠길 것을 우려해 보존대책을 시급히 마련하라고 지시하였다. 보존대책으로 몇 몇 전문가들은 ‘사연댐을 통째로 옮겨야 한다’ ‘상류에 댐을 하나 더 만들자’ ‘암각화 앞에 10m 높이의 제방을 둘
지난 여름 필자는 함께 연구하는 동료들과 유럽의 세계유산 암각화 현장 몇 곳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었다. 암각화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암각화 현장이 어떻게 관리, 활용되고 있는지가 우리의 관심 사항이었다.세계유산은 한 민족 한 국가에서만 보존되고 전승되어야 할 유산이 아니라 전 인류가 공동으로 지키고 전승해야 할 유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포즈 코아는 포르투갈 북동쪽의 코아강과 도루강의 합류점과 가깝고 스페인의 시에가 베르데에서도 멀지 않은 코아강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유명한 구석기 시대의 야외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포르투갈 포즈 코아 암각화 유적 보존에 대한 이야기는 코아강에 수력발전을 최초로 계획한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포르투갈 정부는 1959,
대곡리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로 우리나라 선사미술의 보고이자 백미이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암각조각의 걸작이다.1971년 필자는 문명대, 이융조 교수와 함께 이 유적을 발견한 이후 거의 45년 동안 대곡리 암각화에 대해서 논고를 쓰지 않았다. 해외유적 조사에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이 유적에 대해서는 훌륭한 학자들이 좋은 논고를 쓰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였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된 지 40년이 지났다. 그간 이에 대한 연구가 수행되어 많은 성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바위그림이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로 나뉘어져 있어 논쟁의 쟁점이 되어 오고 있다. 필자는 ‘신석기시대’로 보지만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에는 청동기시대로 되어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가 논쟁의 쟁점이 되
한국이 학술 중심지·정보의 집결지로 격상…국제적 영향력도 상승울산 입장에선 관광산업·지역경제를 활성화 하는 견인차 역할할 것우리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비록 자랑스러운 유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잘 간직하고 알리지 못하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빛내기 어렵다. 아끼는 마음이 있을 때 잘 보존할 수 있는 것이며 자랑스
김대중 전 대통령; “대곡천의 암각화를 관광자원화 하도록 지원하겠다.”이명박 전 대통령; “대곡천 물길을 돌리는 토목사업이 바람직하니 서둘러라.”박근혜 대통령; “암각화 수몰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 사이에 있는 후배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임 뒤 박진구 전
반구대암각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수단이 있을 수 있다.아마도 제일 중요한 일은 암각화 연구자들의 몫일 것이다. 반구대암각화 발견자인 문명대 교수는 암각화가 발견되고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1500여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연구가 많이 부족하다고 최근 지적한 바 있다. 특히 연구논문을 해외의 제대로 된 관련 분야 학회지에 싣고 국제암각
언양과 경주 사이 도로에서 들어와 구불거리는 포장도로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숨은 요새처럼 펼쳐지는 풍경이 있다. 시 한수가 절로 읊어졌을 법한 대곡천과 기암절벽들, 그 위에 웅장하게 자리한 소나무들. 그곳에서 다소곳이 나 있는 흙길을 따라 몇 분 걷다보면 대곡천 건너편에 250여 점이 넘는 조각들이 새겨진 반구대 암각화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울산광역시
귀신고래·긴수염고래·혹등고래 등 수많은 고래그림 새겨져우리 선조들의 주식이 고래였음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물해양문화의 고대사적 시원이라 할만한 소중한 세계인류유우리 식생활사에서 고래고기 섭취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 반구대암각화와 장생포 고래잡이는 수천 년 간극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내재적 연속성이 너무도 극명하다. 고래문화의 장기 지속성이 적어도
내 문학과 그림 작업실이 천전리 각석 가까이에 있다 보니 가끔은 옛 선비들이 머물었던 길을 따라 산책을 하게 된다.대곡천을 따라 가다보면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뚜벅뚜벅 지축을 울렸던 그 덩치 큰 발자국 흔적들은 지구의 종말과 함께 천지개벽이란 새 이정표를 말해 주었기에 한편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연화산 끝자락과 마주보는 국보 제147호 천전리 각석.
필자에게 길고도 깊은 상념을 안겨주곤 하는 반구대암각화를 찾게 되면 언제나 7, 8천년 전의 모습과 지금, 그리고 수천년 후에는 어떠한 환경과 가치를 담고 있을까 하고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러면서도 긴 세월 깊이 숨겨둔 선사시대의 그 모든 것들이 햇살 사이로 걸어나오길 간절히 바라기도 하였다. 태초의 햇살에 당당하게 자태를 뽐내는 그날이 있다면 얼마나 두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2009년 2월에 발간한 는 창덕궁, 팔만대장경판, 종묘제례·제례악 등과 함께 반구대암각화의 가치를 조건부가치평가법(CVM)을 적용하여 측정하였다. 이 연구는 2008년 7월 당시 만 20세 이상, 연소득 1200만원 이상의 성인 남녀 2만186명을 모 집단으로 해 반구대암각화의 훼손 방지를 위해
울주 천전리 암각화가 1970년 12월 24일에 최초로 발견된 다음해인 1971년 12월 25일. 이곳에서 약3㎞ 하류쪽인 대곡리에서 또다른 선사 암각화가 동국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단(단장 문명대)에 의해 발견되어 우리나라 선사미술 내지 선사문화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얻게 되었다.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ㄱ’자로 꺾어지는 곳에 강 바닥보다 한단계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이 소재한 대곡천(반구천, 반계) 골짜기는 수려한 산수로 말미암아 신라시대의 화랑 수련장으로 활용되었던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 중에서 거북 형상의 산 끝자락 석대를 반구대라고 부른다. 사실 이곳에는 이런 명칭이 붙기 전부터 ‘엎드린 거북(盤龜)’이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반구산(연고산)이 있었고 그 모양새도 엎드린 거북 형상이
천전리 ‘서석’ 암각화 중의 ‘선각그림’은 서석 그림 중 가장 늦은 시기의 그림이다. 선대의 동물그림과 도형그림을 피해 암면의 하단부에 배치돼 있는데 주 암면을 기준으로 모두 167개체가 파악되어졌다. 그림의 구성과 내용은 ‘동물’과 ‘자연물’, ‘건조물’들을 모티프로 ‘화랑(花郞)’ ‘행유(行遊)’ ‘포구(浦口)’ ‘기예(技藝)’ ‘신앙(信仰)’ ‘신화(
천전리 서석에는 신라 왕실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514~540년 재위), ‘심맥부지’(深麥夫知, 진흥왕의 이름, 540~576년 재위),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 입종갈문왕의 누이),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 ‘부걸지비’(夫乞支妃, 법흥왕비
기하학적 도형들은 신앙의 대상신석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풍작의 여신에 풍농 기원한 기호동남아·북태평양 연안서도 발견울주 천전리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에 위치한다. 반구대암각화에서 계곡 따라 약 1.5㎞를 거슬러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천전리암각화 또는 천전리서석으로 불려졌다. 천전리암각화는 선사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천전리서석은 세선각(細線刻